김인국 신부 신년특별기고

삼성비리문제를 폭로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총무를 맡고 있는 청주교구 김인국 신부가 2008년 무자년 쥐띠 해를 맞아 <오마이뉴스>와 <지금여기>에 '신년 특별기고'를 보내왔다. -편집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자금 조성에 관한 양심고백 내용을 발표했다. 김인국 신부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새로운 시간을 맞으시는 모든 벗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에는 부디 아픈 데 없이 몸 성하시고, 맘은 매인 데 없이 훨훨 자유로우셔서 몸과 맘 모두 평안하시라고 하늘 높은 데 향하여 빌고 또 빕니다.

작년 10월말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가 저지른 사회적 패악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몇 가지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왜 굳이 사제들이 나서야 했느냐?"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사제들이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일은 여러모로 어색하고 불편한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희들이 먼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체 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사제들마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최강 권력을 거슬러 진실을 외쳐야 하는 일인 줄을 안 마당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명색이 사제들은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행전 4,20)하고 외치다가 스승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던 분들의 후학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묻기를 "김 변호사의 말이 진실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습니다. 글쎄요? 처음에는 참이 왜 참인지 논증하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이 어째서 참이 아닌지는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입증해야할 일이었습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구태여 진실공방을 벌이자는 동기가 무엇인지 도리어 저희가 물어야 마땅했습니다.

삼성그룹과 메이저 언론들은 한사코 '이상한 사람의 위험한 헛소리' 정도로 무시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김 변호사와 사제단의 증언에 애정 어린 신뢰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만큼 국민들은 거대기업들이 저지르는 불법, 탈법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시민의 목숨 건 증언을 한낱 진실공방의 소재로 격하시키려던 것은 진실과 공정을 두려워하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재물에 망가진 국가운영 시스템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라는 성경말씀처럼 영영세세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삼성그룹의 갖가지 비행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혹자는 이건희 일가를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꾼들이라 했고, 누구는 이번 일을 두고 백년 이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진실이라고도 했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말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만 첫 날부터 바로 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질 것만 같아 몇 가지 말씀을 드려봅니다.

지금까지 이건희 일가가 저지른 갖가지 부정은 국가의 여러 감독기관이 제 본분을 다 하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국세청,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감찰기관들이 평시 업무에만 충실했어도 검찰이 굳이 특별수사본부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이 제 소임을 다했더라면 공연히 삼성특검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언론이라도 제 구실을 망각하지 않았더라면 국가기강을 문란하게 만들고 국정을 농단하는 삼성의 무소불위의 횡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성이 검은 돈의 힘을 빌려 웬만한 국가 운영 시스템을 완전히 교란시켜 놓았으므로 감독기관에 의한 정화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절망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습니다.

"검찰은 삼성의 작은 조직에 불과했습니다!"라는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 한 마디에 대한민국 권력기관의 실상이 다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삼성이 저지른 죄 중에 가장 큰 죄목은 공동선을 위해 복무해야 할 권력기관 일체를 사유화했다는 것이고 은연중에 국민들의 영혼을 마구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누가 진실을 밝힐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지금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참 깨끗한 세상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은 없어야 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럽다는 말은 치우다 말아서 '덜 없다' 남은 것이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국민 모두 깨끗한 세상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세상의 쓰레기를 다 치워서 깨끗한 세상을 만들 것입니까?

조만간 특별검사의 활동이 시작되겠지만 과연 얼마나 오염의 실상을 정확하게 밝혀서 병폐의 치유에 나설지 모르겠습니다. 중대 범죄사실을 신고할 곳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맞아주는 데가 없어서 결국 찾아간 곳이 성당이었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말을 다시 기억해보면 그동안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도록 눈 감아 준 혹은 동조해온 사람들이 사제들의 몇 마디 외침 따위로 마음을 고쳐먹거나 태도를 바꿀 리 만무합니다.

명백한 범죄 단서를 보고도 뒷짐 지던 검찰이나 수건돌리기 식으로 꿈쩍도 않던 금감원, 국세청의 노골적인 임무 유기에다 최근 밀행과 신속이라는 기본 원칙을 망가뜨리면서 수사를 방해했던 법원의 뻔뻔스러운 태도까지 합치면 특별검사가 4월 중순께 내놓게 될 수사 결과는 너무나 뻔합니다.

몇 가지 간단한 위법사항을 고발하고 말 것이며, 법원은 법원대로 사실상 무혐의에 가까운 솜방망이를 휘두를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 부자는 휠체어를 타게 될 것이고 마무리는 몇 천억 국민들에게 쥐어주는 선에서, 그리고 언론은 더 이상 경제의 발목을 잡지 말고 앞으로만 나가자는 훈계를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일제히 망각의 강에 빠져서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본래 부정과 일탈의 리듬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우울한 예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와 아이들은 다시 쓸쓸한 뒷골목으로

"삼성에 맞서는 자의 최후는 쓸쓸한 뒷골목이니 어서 타협하라"는 게 김용철 변호사의 지인들이 우정의 이름으로 타이르던 충고였습니다. 실세 권력 삼성이 아니더라도 그간 우리 사회가 내부고발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 최후를 생각하면 그가 겪게 될 장래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 분의 처지는 본인이 결단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와 함께 새해를 맞는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어떤 것입니까? 아이들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사제들을 찾아왔던 수많은 증언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털어 놓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 아이들은 정말 불쌍합니다. 국가 경영에 가담하는 고급 인재가 되더라도 아이의 장래는 삼성의 꼭두각시가 되어 부정과 비리에 가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비자금 가방을 짊어지거나 무노조 경영을 돕느라 유력자들에게 돈다발을 돌리거나 이면계약서를 작성하고 분식회계를 해서 도둑질에 일조하는 것 그리고 범행 일체를 눈 감아 줌으로써 돈 몇 푼 챙기는 것 외에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또 대다수 우리 아이들은 노동자가 될 것입니다. 미행과 감시, 납치와 감금, 폭행 그리고 해고가 예정되어 있는 그 아이들의 미래는 얼마나 참담한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도 배만 부르면 그만일까요?

우리는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아넘긴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재앙은 대한민국이 온통 재벌의 '정신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 이웃들은 이 나라가 불타는 동네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불이야!'하고 외치는 절박한 외침을 한낱 광대의 웃음거리로 여깁니다.

그렇게 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정녕 저희가 광대라면 여러 벗들께서도 광대가 되어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잠에서 깨어나라고. 눈을 뜨고 만사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뿐입니다. 너와 내가 깨어서 도둑을 무섭게 나무라고 그래서 서로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살자고.

두 눈 부릅뜨는 수밖에...

최소한 깨어서 눈 부릅뜨고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잊지는 말자고. 때가 되면 더 크게 알리고 외쳐서 다시는 이런 범죄가 효율과 국가경쟁력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멀쩡한 사람을 잡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이건희, 이재용 단 둘의 행복을 위해 5천만이 이렇게 바보가 되어도 좋은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만 울음이 울컥 쏟아집니다. 혹 절차와 합법의 이름으로 당하더라도 눈 뜨고 겪어야지요. 아우슈비츠의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우슈비츠를 망각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서둘러 우울한 결말을 예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부디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고 조바심이 나서 말씀드렸습니다.

벗들 모두 강녕하십시오!

/김인국 200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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