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종교관은 가톨릭뿐 아니라 이슬람교, 무속신앙, 불교, 유대교, 힌두교, 위카(Wicca), 무신론, 불가지론, 근본주의 개신교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입니다. 종교뿐 아니라 인종적,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미국인 대학생들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매 수업 설레고 긴장되는 모험이지요. 하지만 학생들이 ‘교양필수’로 들어야 하는 신학개론 수업은 학기 초에 버성김이 심합니다. 대부분 듣고 싶어 듣는 수업이 아닌데다, 신학은 그저 교리수업 혹은 신앙입문의 연장일 뿐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학기 첫날 학생들은 “신자도 아닌데 내가 왜 이 수업을 들어야 해” 혹은 “교리수업 지겹게 들었는데 또 들어야 하나”하는 표정으로 수업에 들어오곤 합니다.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과 신학하기

신학개론 수업을 처음 맡게 되면서 제가 고민했던 것은 이 다양한 학생들에게 신학이 의미 있으려면, 그리고 재미있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였습니다. 아마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청년사목을 하시는 많은 사목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해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제가 수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잠정적인 신학의 정의(定義)는 ‘각자가 속해 있는 삶의 지평 너머를 상상하는 담론’입니다. 수업의 목표는 ‘그 지평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구획, 재단, 억압하는 힘들을 발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찾는 것이고요. ‘지금 여기’의 삶의 모습들을 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기,’ 즉 ‘세상을 운영하는 논리와 질서를 거슬러 생각해 보기’가 한 학기 동안 제가 학생들과 주로 씨름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서는 이런 의미에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예화들을 많이 담고 있지요. 그러면서 저는 신학이 “교회의 교리와 지침을 전달하는 학문”이 아니고, “제도교회의 전유물”도 아니며, “너희들에게 특정종교의 신앙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합니다만, 물론 제 말이 첫 시간부터 학생들에게 가닿을 리는 만무하죠.

뚱하고 반응 없던 학생들이 “어, 다르다?”는 눈빛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는 서너 주를 넘기면서부터입니다. 마음을 먼저 여는 학생들은 주로 자신의 종교, 성 정체성 등을 빌미로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상처를 받았던 학생들이지요. 학기 초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고 냉소하던 이 친구들이 점점 자신감을 얻어 수업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 자연스레 수업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들과 제출하는 과제물들은 가끔 혼자 기억하기 아까울 만큼 번뜩이는 통찰을 담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마음을 굳게 닫고 수업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제껏 단 한번 신앙의 위기도, 도전도 느껴보지 못했던 착실한 신자들이 이 부류에 속하고, 또 신학은 “비합리와 비논리의 결정체”이며 “신학과 과학적 사고는 대립한다”는 전제를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학생들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극과 극인 이 두 그룹의 친구들이 공유하는 것은 ‘자신의 지평 너머’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죠. 이 친구들은 성적에 대한 불평도 많습니다. 수업 시간에 읽고 들은 내용만 잘 외워 달달 읊조리면 당연히 좋은 성적을 받을 줄 알았는데, 토론은 자신들이 예상한 방향과 엇가기 일쑤고 과제물도 나름 자신 있게 했는데 잘했다는 소리를 못 들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지 싶습니다.

▲ 마을 공동체 '산위의 마을'이 전기 없는 날에 영명축하식을 진행하고 있다.(사진 출처 = 산위의 마을 홈페이지)

낯선 하루, “언플러그데이”

막상 학기말이 다가오면 이 친구들 마음이 급해집니다. 저는 성적 걱정이 심한 학생들을 위해 별도의 기말 과제물을 주곤 하는데요, 이번 학기에는 좀 색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언플러그 데이’(A day of unplugging) 경험입니다. 말 그대로 “언플러그.” 모든 전원을 차단하고 하루를 보낸 뒤,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7-8장짜리 페이퍼를 쓰는 것이죠. 쉽지 않겠지요. 아침에 잠을 깨우는 알람부터 스마트폰, 컴퓨터, 전자레인지, 체육관 사용, 자동차, 실내 냉방 등등 하루 일과가 모두 전원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무리가 될 줄 알면서도 강행했던 이유는, 언플러그 데이의 원래 취지인 “느리게 사는 삶의 가치”를 느껴 보자는 것도 있지만 (언플러그 데이 유래와 취지 참고), 그보다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낯설어지는 경험을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낯설음이 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반경 너머를 보게 하고 “왜?”라는 질문을 되찾아 주지 않을까하는 바람으로요.

성적을 담보로 이 경험을 제안한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학생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담아 글을 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과제를 수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더군요.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중독 상태를 비로소 깨닫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빌린 친구도 몇몇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전자기기를 친구의 사물함에 넣어 잠그고는 하루 동안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나요. 하지만 결국 학생들이 제출한 페이퍼들을 읽어 보니 제 ‘무리수’가 이번엔 제대로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가벼운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고백하더군요. 수시로 눈과 귀를 붙잡아 두는 텍스트 메시지도 없고, 초단위로 업데이트 되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도 없고, 늘 귀에 달고 다니던 이어폰도 빼고 나니 쏟아지는 빈 시간이 너무 길고 둘러싼 빈 공간이 너무 썰렁해 덜컥 불안하고 두려워지더라는 겁니다. 그렇죠, 익숙한 습관과 질서를 벗어나면 우선 그런 느낌이 들겠지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게 손가락을 깨물며 침대 위를 무료하게 뒹굴다, 혹은 방안에서 안절부절 서성대다, 결국 밖으로 나선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소박한 기쁨들이 펼쳐집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산책을 나선 한 친구는 3년을 거의 매일 나오던 조깅 코스인데 그날 처음으로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나뭇잎들의 색깔이 단순히 초록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초록임을 깨닫고, 봄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바위에 손을 대어 보았다는군요. 자전거를 타고 다운타운에 나간 친구는 처음으로 대형 마켓이 아닌 지역 식료품점에 가서 지역 농부가 직접 재배한 제철 토마토를 사 먹어 보고, 운전하고 지나다닐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곤 했던 한 노숙인이 손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가족들과 함께 언플러그 ‘주말’을 보낸 친구는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반나절 동안 엄마와 오롯이 눈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같이 장을 보고, 저녁식사 준비를 했답니다. 2년 전에 생일선물로 받았지만 책장에 처박아 두었던 시집을 이제서야 비로소 꺼내어 읽어 보았다는 친구도 있고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유기동물 보호소에 가서 버려진 개와 고양이를 돌보며 하루를 보내다 아예 정규 자원봉사자로 등록을 하게 되었다는 친구도 있습니다.

신학 - “날것”의 기억들과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세상

그렇게 무장해제가 된 채 한 학기 내내 다루었던 신학적 질문들을 되돌아보고 써 낸 글들은, 아직 논리가 빈약하고 개념적인 이해가 부족하다해도 진정성이 가득합니다. 한 학기 동안 그렇게 애먹였던 이 친구들에게 우선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이들을 완고하게 붙잡고 있던 선입관과, 24시간 스스로를 묶어 두던 세상의 속도와, 그 속도가 제공한 편의에서 풀려날 계기였던 것이지요. 어쩌면 제가 한 학기 동안 강조했지만 이 친구들에게 닿지 않았던 제 신학개론 수업의 요점이 이 하루의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전달된 것 같기도 합니다. 낯설게 바라보고, 거슬러 생각하는 것, 그 낯섬과 거스름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 말입니다.

아마도 이 친구들은 제가 가르친 신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을 곧 잊어버리겠지요. 하지만, 낯선 빈 공간과 빈 시간을 통해 만져 본 “날것”의 기억들—나뭇잎의 초록들과, 노숙인의 한쪽 손과, 어머니의 눈과, 도움이 필요한 어린 동물들의 울음—만은 오래오래 간직해 주면 좋겠습니다. 결국 그 날것의 기억들에 의미를 만드는 일, 그것들을 통해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저는 이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시(詩)는 일상의 언어에 낯설음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지요. 아무럴 것 없는 일상이 시인의 심상으로 걸러지면 시간과 공간에 파열이 생기고, 순차적인 흐름과 배열이 깨어지고, 기억과 기억이 얽힙니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다른 세상을 열지요.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 즉 세상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낯선 것을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의 역할은 그 신비를 인간의 삶과 엮어 내어 신에게 향하는 길을 열되, 그 신비가 결코 인간의 힘으로 구획, 재단, 억압되지 않도록 비판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따라서 인간을 단순한 부속품으로, 폐기 가능한 일회용품으로 만드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며 다른 세상을 향한 상상의 지평을 열지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게는 그 새로운 지평 너머에 예수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 준 하느님 나라가 있겠지요.

신학의 본질이 그러하건대, 신자들의 삶으로 다가갈 통로가 좁디좁아 단순한 교리교육이나 신앙 입문으로 오해되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그러면서 교회는 점점 더 세상의 질서에 녹아들어 또 하나의 편의 시설처럼 되어가고 있고요. 그렇게 보고 자란 제 학생들을 탓할 일이 아니지요. 실은 삶의 언어로 신학을 풀어내지 못한 신학자들의 책임이 크지요. 반성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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