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김수환과 요한바오로2세를 떠나 보내며


2009년 2월 17일 오후, 서울에서 다시 시작하는 두번째날, 첫나들이를 하기에는 많이 쌀쌀하고, 볼에 부딪치는 겨울바람은 아직 한겨울의 냉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않아 졸린 눈을 비비며, 명동성당 뒷뜰에서 미사를 기다리는 줄에 서있던 나는 그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의 문상객만은 아니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여섯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삼삼오오 함께 와서 나처럼 줄에 서있는 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나누는 이야기를 귀를 세워 들으며 다음 차례의 위령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줄에 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이미 한번의 경험으로 나는 내가 서있는 줄의 의미를 느끼고 있었고, 기사를 쓰려고 추위를 무릅쓰고 카메라와 함께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호기심에 비할 바 없는 큰 호기심과 기대로 그 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줄을 설 기회를 얻은 것에 고맙기도 하고 정말로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2005년 요한바오로2세 선종시 김수환 추기경이 애도의 메시지를 발표한 뒤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사진출처/연합뉴스)

미사를 기다리면서 문득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가 여러 대륙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울리는 데 성공하고, 그 덕에 감독과 제작사가 대박을 터뜨렸다는 보도가 떠올랐다. 그렇게 많이 채찍질을 당하고 어떻게 예수가 걸어갈 만큼 멀쩡할 수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그 영화를 보고도 실감할 수 없다면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심하게 얻어맞고 모욕을 당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에 몰렸고, 실컷 울어 충혈된 눈으로 슬픈 감동과 함께 돌아가 그 영화의 대단함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그 제작자는 마침내 로마의 교황님을 알현하는 영광을 얻기에 이르게 되었다. 빨간 페인트와 에나멜로 핏자국을 만든 것이 다 드러나는 그 영화의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예수의 고통으로 동감하는 순진한! 친구들에게 독설에 가깝게 그 감독의 상업성을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영화를 잊지 못하는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기대! 감히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극장으로 몰렸던 사람들처럼, 명동에 서 있는 나를 자극하는 그 기운은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중하려 뛰어나가는 계집애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그 삶의 기운처럼, 나는 그렇게 초상집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그 따스함을 기대하고 뛰어온 것이다. 아니 분명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불러내는 그 훈기를 만나게 될 것을 알고 그래서 그 줄의 어디쯤에 서게 된 기쁨을 몰래 누리고 있었다. 그분의 죽음은 “선종” 이라 칭해졌는데, 캘커타의 데레사 성녀에 이어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에서는 두번째로 그 말이 쓰여진 경우라 들었다. 그러한 칭호가 살아있는 이들의 민망함을 덜어줄 수 있다면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어쨌거나 그런 칭호와 무관하게 난 또 한번의 화해를 기대하고 그 줄에 서 있었다. 몇년전 경험했던 그 화해와 위로의 기쁨을 떠올리며 …

요한바오로 2세 선종, 아버지와 나눈 화해

요한바오로2세

2005년 4월 1일 늦은 밤, 나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광장 한 모퉁이에서 불켜진 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로사리오를 드리고 있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표현한 '빛의 신비'가 포함된 꾸러미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임종하는 아버지와 화해하는 딸이 되었다.

난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 좋은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고집이 센 분이었고, 난 그 아버지의 고집을 제대로 닮은 딸이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또 로마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동안 교황님과 로마교회의 완고한 모습은 내게 또다시 고집불통 아빠와 딸의 대립각을 세우기에 충분한 신학적 쟁점들로 다가왔다:

비어있는 베드로 광장이 사람들로 메워질 때 교회는 그 힘을 얻는다. 양들이 있어야 목자의 자리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신자들은 더 이상 음-메 하거나 침묵하는 양이 아니다. 로마로 상징되는 서방 교회는 아직도 더 작아지고 더 겸손해져야만 다른 교회공동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등등.

요한 바오로 2세의 창문 아래 있는 베드로 광장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를 하거나 기타반주에 맞추어 감미로운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왠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이 교황이 되기 전에 걸어왔던 어려운 날들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목말랐던 그 어린아이의 사랑이라는 것까지 ...

그리고 4월 2일 아침, 교황청 신문은 “내가 여러분을 불렀는데 그 부름에 응해주어 고맙다” 는 교황님의 한마디로 제호를 장식했다. 살아있던 마지막 날 밤에 그분은 화해하려고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바티칸 나라의 어진 임금님과 오만함을 뉘우친 어느 백성의 만남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는 한 분, 그 뿌리에 함께 연결되어있음, 그래서 하나임을 확인한 화해였다.

부활의 기쁨이 온 로마에 가득했던 그 사월의 하룻밤을 선채로 꼬박 지새고, 동이 트는 아침에 영원히 잠이 든 그분께 마지막 인사를 한 그 순간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만남으로 내게 각인되었다. 마치 멜 깁슨이 만든 영화에서 예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그 눈빛으로 각인되었듯이.

한국에 오자마자 맞게 된 혜화동 할아버지의 영면과, 그분을 뵙기 위한 줄에 서서 떠오르는 기억들은 내게 또 다른 위로를 주었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의 기운,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의 향기를 다시 느끼는 기쁨이었다. 당신이 맡은 추기경 자리 때문에 더 낮은 자리로 내려앉지 못해서 자책했다는 그분을 가까이 뵌 것은 교황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로마에 오셨을 그때 한번 뿐이었다. 그 로마의 장례식이 역사적인 사건이 된 것처럼 서울의 장례식 또한 한국사에 기록될 사건이 될 것을 짐작하는 것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교황이거나 추기경이어서 장례 행렬이 대박을 터뜨린 것은 아니다

그 줄에 선 사람들이 모두 천주교회의 신자가 아니었던 것은 이미 보도를 통해서 알려졌고 일종의 '사랑의 전염병'이란 현상이 사회적으로 생겨났다. 로마에서도, 또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한국의 명동에서도 그 두 예수쟁이들은 봄 향기보다 더 진한 인간의 향기를 풀풀 날리며 되돌아갔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슬픔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하고 위로의 기쁨을 나누어 주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삶을 위해 싸우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준 그 바보 예수의 모습을 그저 고집스럽게 따른 까닭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하느님의 향기를 느꼈기에, 그에게서 풍기는 사람의 향기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분의 향기가 가득 담겨있었기에 그렇게 고백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 안에 뚜껑이 열리지 않은 그대로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향기가 어느 인간들에서는 바보같이 배어 나온다.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좋다. 그 높은 의관으로도 눌러지지 않았던 그 “하느님의 향기”가 바보 예수같이 살고 싶었던 두 사람에게서 흘러 봄의 향기보다 더 진하게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낮은 곳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을 절대로 못 본척 해야 하며,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소리치는 이들의 소리를 음-메 하는 양들의 울음으로 흘려버릴 것이며, 혹시 인간의 향기를 강하게 퍼뜨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먼발치에 두고 부지런히 도망갈 일이다. 삼십육계 또한 하나 남은 공격술인 것을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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