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5월 24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사도 2,1-11

우리는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께서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봅니다. 성령이 현존하신다는 이미지는 두 가지입니다. 바람과 불입니다. 사도들은 바람을 통하여 성령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바람의 속성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강함과 부드러움. 세찬 바람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합니다. 비와 바람을 동반하는 태풍은 가로수를 넘어트리기도 하고 거대한 집도 날려버립니다. 모든 것을 부수어버리고, 파괴하는 속성으로서 바람입니다.

성령 또한 이러하십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으로서의 성령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입니다. 옛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창조의 바람입니다. 또한 옛것을 없애 버리기 때문에 정화의 바람입니다.

바람은 또한 부드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올 즈음,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느낍니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맞고 있으면 내 안도 따뜻해지고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성령의 현존을 거센 바람 속에서 체험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성령의 현존하심을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언제나 거센 바람으로만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거센 폭풍 속이 아닌 부드럽고 여린 산들바람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대부분의 성령의 느낌은 거세기보다 잔잔하고, 부드럽습니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두 번째로 성령의 현존의 이미지는 불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불은 무언가를 데우기도 하고 태우기도 합니다. 불의 이미지로서 성령은 바람처럼 정화의 의미도 있습니다. 바람이 해로운 것을 쓸어 버린다면, 불은 태워 버립니다. 우리가 알듯이 금을 정제할 때, 불순물을 태워야만 순금이 나오듯이, 그렇게 불의 이미지로서의 성령은 우리 안의 부정적인 것들을 태워 정화합니다.

또한 불은 따뜻함을 줍니다. 어릴 적 우리는 날이 추운 날, 불을 피워 놓고 시린 손을 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불을 쐬고 있으면 두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는 불의 온기를 느낍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덥힙니다. 성령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차디찬 마음을 데워서 따뜻하게 합니다. 굳어진 마음을 풀어서 부드럽게 합니다.

또한 불은 어둠을 밝힙니다. 우리는 캄캄한 곳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집안에 단 몇 분만 불이 안 들어와도 얼마나 불편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성령은 우리 안의 어두운 곳을 환하게 합니다. 이렇게 바람과 불의 이미지로서의 성령은 우리 안의 어두운 것을 밝히고, 해로운 것을 없애고, 부정적인 것을 도려내고,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들을 낫게 하면서 새롭게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러한 성령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일치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다른 언어로 말하는데, 말이 다른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언어로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 다른 것을 일치시켰다는 겁니다. 갈라진 것을 하나되게 했다는 겁니다. 사도들의 체험은 단지 언어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 2,11) 다른 무엇이 아닌,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관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창조의 숨결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던 아담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비로소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 죽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던 사도들이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서 변화됩니다. 생명의 기운을 받고 문을 박차고 나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외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성령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폐쇄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한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즉, 삼위일체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체험이라 할 때, 그 체험 속에는 성부 따로, 성자 따로, 성령 따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모두가 계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늘 당신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도 늘 당신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삶의 생기가 올라오면 그것은 곧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은총과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할지라도 성령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사도들은 바람을 통해 성령을 느꼈고, 불의 이미지를 통하여 성령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 기도를 통해, 성사를 통해 성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활동을 느낀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복음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음을, 함께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살아가십니다.

 

 
 

최성영 신부 (요셉)
서강대학교 교목사제
예수회 청년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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