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5화 (열네 살 때, 1953)

 

할머니가 나를 애육원에 맡겨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는, 형과 나를 나무꾼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셨기 때문에, 이리저리 궁리를 하시다가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찾아내셨어. 당시 봉화에는 작은 규모의 고아원이 있었고, 그 고아원 정태중 원장님이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아버지 후배였지. 할머니는 그 고아원 원장님을 찾아가 사정했고, 원장님도 우리 형제를 맡기로 쾌히 승락하셨어.

그래서 형과 나는 ‘애육원’이라고 하는 전쟁고아들이 사는 집 식구가 되었지. 당시 애육원은 읍에서 조금 떨어진 삼계리에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신흥천이 있어 그 물이 내성천으로 흘러들었어. 신흥천을 건너는 다리는 외나무다리와 징검다리뿐이었고, 비가 좀 왔다 하면 다 쓸어가 버리지만, 평소에는 트럭이나 지프차도 건널 수 있었지. 애육원에서는 원장님을 아버지라 했고, 아이들은 나이에 따라 형이나 동생이라 했어. 앞에는 내가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있으며, 비슷한 처지의 형들과 동생들이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지. 아이들은 모두 30명쯤 되었을까! 그 당시 원장아버지는 며칠에 한번 꼴로 애육원을 들르셨어. 나중 생각이지만, 애육원이 아직 초창기라, 집도 지어야 하고 양식도 마련해야 하니까, 외부활동을 하시느라 그랬을 거야.

불난리에 물난리

더운 여름날이었어. 비가 조금 온 뒤라, 형들은 뒷산을 돌아다니며 버섯을 땄고, 동생들은 앞내에서 멱을 감고 놀았어. 형들이 작은 강당 겸 창고에서, 산에서 따 온 버섯을 풍로불에 끓이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내를 건너오는 트럭소리가 난 거야. 원장아버지가 오신 거지. 다급해진 형들은 버섯이 든 냄비를 풍로불에 얹은 채로 집 지으려고 쌓아둔 목재 밑에 숨겼어. 원장아버지가 아시면 야단맞을까 봐 그랬던 거야. 그리고 모두 식당에 모여 원장아버지 말씀도 듣고 저녁밥도 먹었지. 원장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잠을 자기 시작했어. 그 버섯 냄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닌 밤중에 느닷없이 ‘불이야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일어나!’ 하는 고함도 들렸어. 불난리가 난 거야. 모두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한 채, 그릇이란 그릇은 모조리 동원하여 물을 퍼 날라 끼얹기 시작했지. 죽을 둥 살 둥,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애쓴 보람에 불은 잡을 수 있었어. 그러나 기진맥진, 모두가 지칠대로 지쳤지.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거야. 억수같이 내리는 장대비였어. 앞내는 삽시간에 불어나 집으로 차오르더니, 조금 전 불타던 집은 물론 멀쩡한 집까지 모두 쓸어가 버렸어. 날이 새기 시작했고, 우리는 겨우 집 뒷산으로 몸을 피했지. 불난리에는 남는 게 있지만, 물난리에는 남는 게 없다더니, 바로 그랬다구. 우리는 하룻밤에 불난리ㆍ물난리를 연거푸 겪게 되었고, 한꺼번에 화재민ㆍ수재민이 되어버린 거지. 앞내는 불어난 물로 건널 수 없어서 우리는 갇혀버린 거야.

그런데 당시 애육원에 몸으로 봉사하던 건장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 소식을 바깥에 빨리 알리려고 그랬던지, 혼자 내를 건너가다가 거센 물살에 쓸려가게 되었어. 그걸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지. 우리는, 그가 우리 눈에서 사라지자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는데, 그가 기어이 살아나온 거야, 내성천을 떠내려가다가 물 속에 드러난 나무뿌리를 잡고 죽자 살자 기어 나왔다고 했어. 워낙 힘이 센 장골이기도 했지.

우리는 모두 뒷산을 타고 내려가 내성교를 건너서, 우선 원장아버지 집으로 갔어. 나중에 들은 얘긴데, 재목 밑에 풍로불을 넣고 그대로 둔 이가 다름 아닌 형이었고, 또 형은 경찰조사까지 받았다는 거야. 불난리 후 형은 어쩐지 풀이 죽어있는 듯 했어. 내가 물어도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더 캐묻지도 못했지.

우리 애육원 아이들은, 원장아버지 집에서 가까운, 나중에 교육청이 된 빈 공공건물을 빌려 화재민ㆍ수재민 생활을 시작했어. 그래도 여름이었기에 지내기가 수월했지.

휴전협정 조인이 7월 27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무렵이었겠네요?

우리 고아들은 휴전이 아니라 불전쟁 물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셈이군!

내 기억에 그때는, 고아원에 대한 정부지원도 전혀 없었고, 또 한국천주교회를 통해 나눠주던 미국 국민의 구호물자도 나오기 전이었어. 가끔 서양의 몇몇 종교단체의 지원과 주한미군의 건축자재 지원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전쟁고아-화재민-수재민인 우리는 겨우 하루 두 끼로 연명하고 있었어. 다행히 주한미군의 목재 지원을 받아, 원장아버지 집 마당에 우리가 살 숙소와 작은 강당을 짓게 되었지.

봉화초등학교에 입학하다

2학기가 되자, 원장아버지가 나를 봉화초등학교에 편입시켰어. 그래야 중학교에 가기 쉽다고 하셨지. 그때는 시골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뤘고, 시험에 떨어져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어.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한 것 같아. 나는 동기들보다 한 해 선배(!)인데다, 두어 달 빠진 졸업생이었으니까. 그 무렵 학교에는 축구공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난감공도 없었어. 우리 아이들은 빈 깡통을 우그려 그것을 차며 축구를 하기도 했고, 돼지 오줌통(방광)을 얻어 오줌을 비운 후, 바람을 불어 넣고 묶어서 축구공으로 쓰기도 했지.

그 해 가을 군민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우리 원장아버지가 1000미터 장거리경기에 출전했어. 원장아버지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우리는 큰 기대를 안했지. 처음 얼마동안은 중간쯤 뛰시다가, 트랙을 두 바퀴 돌고나서는,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대여섯 명씩 제치기 시작하셨어. 머리를 한번 끄떡하면 한 사람 제치고, 또 머리를 끄떡하면 또 한 사람 제치고 하시더니, 이윽고 2등을 반 바퀴쯤 따돌리고 결승테이프를 끊으셨어. 난리가 났지. 관객들은 하나같이 한 사람 한 사람 제칠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고, 또 일어서서 펄쩍펄쩍 뛰는 아이들도 있었지. 펄쩍펄쩍 뛰던 아이들이 바로 우리 애육원 아이들이었어. 그 순간은 전쟁도 잊어버리고 생이별도 잊어버리고, 불난리 물난리고 모두 잊어버렸다구. 정말 신나는 날이었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사람들은 별거 아닌 것에 열광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더라구!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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