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회의 레이먼드 설리번 신부님이 5월 15일 선종하셨다. 우리에게는 반예문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더욱 친근하신 분이다. 뒤늦게 그분의 선종소식을 듣고 메리놀회에 연락하니 18일 오후 4시 그분이 임종 때까지 지내셨던 세인트 데레사 미션에서 웨이크업 세리머니(Wake up ceremony)라는 연도를 겸한 고별의식을 하고 다음 날 오전 9시 장례미사를 봉헌한다고 했다.

▲ 5월 15일 선종한 레이먼드 설리번 신부 (사진 제공 = 메리놀 외방선교회)
나는 마지막으로 그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날 오후 뉴욕주 오시닝에 있는 메리놀회로 달려갔다. 그분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관에 누워 계셨으나 양쪽 손잔등에 주사 바늘 자국으로 보이는 시퍼런 멍이 퍼져 있어 그분의 투병 마지막 고통을 보는 듯했다. 성당 입구에는 그분 생전의 사진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두 한국에서 활동하셨던 사진들이다. 이날 참석한 20여 명의 메리놀회 사제들과 멀리서 소식을 듣고 찾아 온 몇 명의 한인 수녀들은 함께 로사리오 기도와 시편을 바치고 그분 생전의 회고담을 나누었다.

반 신부 누이동생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대부분 한국과 관련된 그분의 생전 모습을 회고했다. 특히 메리놀 수녀회 한인 수녀는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님이 만든 음악을 듣고 자랐으며 그 덕분에 성소를 가지게 되고 뒷날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게 되었노라고 증언했다.

1927년 2월 14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반 신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세속적인 부와 영예를 포기하고 사제로서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하려는 꿈을 가지고 1947년 메리놀회에 입회했다. 메리놀 칼리지에서 라틴어를 공부한 그는 정식으로 메리놀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54년 6월 1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반 신부는 사제로서의 첫 임지로  전쟁이 끝난 직후의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예일대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1955년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1989년 베트남 보트피플을 돌보기 위해 홍콩으로 떠날 때까지 34년간 한국에서 봉사했다. 반 신부는 한국에 온 뒤 15년간 청주교구 총대리와 내덕동 주교좌성당 주임 등을 거치면서 가난한 어린이를 위한 교육과 농아들과 맹인들을 위한 재활시설을 운영했다. 평소 음악에 조예가 깊어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 솜씨를 자랑하는 반 신부는 1971년부터 서울 한국 가톨릭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가요를 외국에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자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사소한 이유로 많은 가요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던 1970년 대 암울했던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만 했던 김상희, 양희은, 송창식, 김도향, 이용 등 많은 대중가수들이 반 신부의 그늘로 찾아들었다.

반 신부는 직접 ‘내가 살고 싶은 곳’ 등 여러 동요들을 작사, 작곡하여 김상희에게 부르도록 했으며, ‘바보처럼 살았군요’ ‘잊혀진 계절; 등 여러 한국가요들을 외국에 소개하기 위해 영어로 번안하여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이란 음반집을 제작해 미국에 보급했다. 반 신부는 음반집 판매로 10만 달러 가까운 수익금을 마련해 당시 캄보디아 광산사고 희생자들과 서울의 맹아와 농아 재활시설인 라파엘의 집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성당 입구에 전시된 반예문 신부의 생전 사진 (사진 제공 = 장기풍)
이밖에도 반 신부는 여러 건전 가요를 작사, 작곡하여 가수들에게 부르도록 했다. 그분이 작곡 작사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Christ, Our Peace)는 1989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44차 국제 성체대회의 영어 테마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반 신부는 지금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류문화의 최초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1997년 한국 대중가요협회는 이러한 그분의 공로를 감사히 여겨 반 신부에게 공로 트로피를 전달했다. 20대 후반 젊은 시절 사명감을 갖고 한국에 왔던 반 신부의 한국 사랑은 유별날 정도였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던 반 신부는 어른들에게는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리는 것을 좋아하셨던 분이다. 내가 이날 추도식에서 뭇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한국식으로 영전에 두 번 반 큰절을 올린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반 신부님이 뉴욕 오시닝 메리놀 본부에 복귀한 1993년부터 거의 매년 찾아뵐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 갈 때마다 그분 특유의 유머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신부님은 미국에 와서 사니까 한국말을 쓸 기회가 없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며 나의 방문을 기다렸다. 내가 신문사를 은퇴한 뒤 몇 년 만에 찾아뵈었을 때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나를 식당으로 안내하여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2,3년 찾아뵙지 못하다 지난 해 10월 한국에서 오신 대구대교구 원로사제 허연구 신부를 모시고 반 신부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거처를 양로원인 세인트 데레사 하우스로 옮긴 후였다.

▲ 관에 누워 있는 반예문 신부 (사진 제공 = 장기풍)
약간 정신이 맑지 못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신 신부님이 갑자기 “이제 한국말 생각났어요.”하며 반가워하신다. 내가 생각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보고 한국말이 생각나신 것이다. 신부님은 보행기에 의지하여 우리를 자신의 방 복도로 이끌었는데 그곳 벽에는 온통 한국에서의 사진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이 사람이 김상희, 이 사람이 양희은이예요” 신부님은 우리를 만나 갑자기 기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한참 한국에서의 추억을 반추하던 신부님은 “나 저쪽 빌딩에서 이리로 옮겼어요. 이곳이 내 마지막 집이예요. 얼마 있으면 저쪽 뒷마당으로 옮길 거예요”하며 활짝 웃으신다. 여전히 유머가 대단하시다. 뒷마당은 메리놀 회원들의 공동묘지다.

작별인사를 드리는 나에게 신부님은 내 손을 꽉 잡으면서 또렷한 영어로 “나는 항상 한국 사람들을 내 심장에 간직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시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으셨다. 이것이 나와 신부님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반 신부님은 당신 말씀대로 한국 사람들과 한국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뒷마당 집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신 것이다. “주님, 착한 사제 레이몬드 설리번 신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2015.5.19. 뉴욕)
 

장기풍 (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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