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월호’를 넘는 법

세월호참사 발생, 400일! 우리는 세월호를 넘을 수 있을까? 세월호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 희망과 달리, 길은 아직 뿌옇기만 하다. 지난 5월 6일, 세월호특별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세월호특별법 대통령령, 이른바 ‘쓰레기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제 대통령의 재가만 남았고, 청와대는 아직까지 침묵 중이다. 여론을 저울질하며,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해 정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최대치는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특조위 구성, 여기까지다.” 시행령을 통해 드러난 청와대와 정부의 의도다. 이리들이 가면을 벗었다. 이젠,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차벽이 다시 등장했다. 차벽은 위헌이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고, 헌재는 수수방관이다. 물대포와 최루액이 다시 낯익은 풍경이 되어간다. 골목과 지하철 입구를 막아, 보행의 자유를 앗아 가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수순으로 보면, 다음에는 경찰봉과 방패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저들은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 요구에 왜 그토록 과민한, 과격한 반응을 보일까? 저들은 무서운 것이다.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 과정에서 자신들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진실이 드러나 부정한 권력, 부정한 특혜, 온갖 부정과 비리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어둠과 거짓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드러나면,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빛 앞에 스러지듯, 거짓도 진실 앞에서 스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진상규명 요구를 필사적으로 막고,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을 통과시켜 버렸다.

▲ 해양수산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에 대해 수정이 아닌 즉각 폐기를 촉구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 ⓒ정현진 기자

폭력으로 폭력을 이겨야 하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미사 드리고 자기자리에서 묵주기도 하고 있을까요? 성명서 발표하고 기자회견할까요?”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날, 어디선가 들은 한탄이 기억난다. 상황이 이런데도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나오는 하소연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물리적 힘으로 저들을 꺾을 수 있는가? 물리적 힘은 유혹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설혹 이긴다 해도, 이번에는 우리가 계속 폭력적이어야만 하는 모순에 빠진다.

“우리는 순수해야만 침몰하지 않습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순간 다 말려듭니다.... 그런 식으로 싸워서 이긴다 해도 이긴 게 이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원고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의 말이다.(“금요일엔 돌아오렴”, 185쪽) 칠흑 같은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빛이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술수와 계략을 이기는 것은 더 교묘한 술수와 계략이 아니다. 바로 순수함이다.

이 말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 한가한 소리로만 들리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아직 이 싸움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저들의 정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저들의 행태를 관찰해 보면, 저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7,14) 예수의 말씀은 오늘에도 그대로 현실이다. 저들은 어둠과 거짓의 세상에, 우리는 빛과 진실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다. 저들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이유는, 우리가 빛과 진리로 저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둠과 거짓의 세상에 속하는 저들은 악의 힘으로, 악을 원리로 움직이고, 행동한다. 악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선으로만 가능하다. 악은 악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겨봐야 여전히 악이다. 그렇게 이긴다한들, 악의 지배는 여전하다. 악은 그 반대의 힘, 순수함으로만 꺾을 수 있다.

순수함은 무엇인가? 세월호참사로 세상을 떠난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에게 순수함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순백의 순수함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다. 순수함은 물속에 잠겨서도 자신의 구명조끼를 서슴없이 친구에게 내주었던, 그 마음이다. “내 동생 어떻게 해!” 순수함은 죽어가면서도 혼자 남게 될 동생을 걱정했던, 그 마음이다. 순수함은 자신을 친구에게, 동생에게, 그렇게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래서 순수함은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큰 선이다. 순수함 앞에서는 어떤 어둠도, 어떤 술수와 계략도, 어떤 폭력도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사라지게 된다.

순수함으로 악을 물리치기 위해 할 일이 꼭 하나 있다. 우리가 아이들의 순수함을 배우고, 그 순수함을 퍼뜨리는 일이다, 우리 삶 전체로. 이곳 광화문, 세월호 광장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우리 각자가 사는 곳, 일하는 곳에서도 순수함이 넘쳐나 어둠이 훤히 드러나야 한다. 저들이 청와대를 차벽으로, 물대포로, 캡사이신으로 지킬 때, 우리는 거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물들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저들을 포위해 버려야 한다. 저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행진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순수함이 청와대를 에워싸는 것은, 자신들을 포위하는 것은 결코 막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등지지 말고 세상에 남길 바라신다. 다만, 우리가 악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기도하신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에 물들지 않으려면, 우리 아이들의 순수함을 입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가르쳐 준 순수함은 아마도 돈과 힘만 쫓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순수함의 선물을 받을 것인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세월호가 나를 세상으로 끌어냈다

여전히, 의문이 들고, 망설여진다. “그렇게 해서 과연 승산이 있을까?” 저 강고한 세력 앞에서, 순수함만으로 승산이 있을까? 인간적으로만 계산하면, 당연한 의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거세게 몰아치는 세상의 반복음적 세력과 흐름을 깊이 인식하고 계신다. 교종은 세상을 “폭력과 증오, 무고한 이의 고통과 돈이 지배하는 제국”이라고 규정하셨다. 그러면서 물으신다. “이 모든 것을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직면한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세상의 악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있을까? 교황의 응답은 간단하고, 그만큼 단호하다. “할 수 있습니다.”(2013년, 재의 수요일 미사) 교황의 응답은 무모한 것일까? 희망의 근거가 있을까? 있으면 무엇일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2014년 8월18일,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그렇다. 우리의 희망은 단순한 계산이나 예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절망과 죽음에서 솟아나는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거기서 솟아오르는 희망이다.

▲ 작년 11월 5일,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결단과 가족 면담을 요구하는 농성장 철수가 진행 중인 가운데 한 세월호 가족이 농성장을 찾아 온 시민과 포옹하고 있다.ⓒ강한 기자
“세월호참사 이전과 이후의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하는데, 한다는데, 과연 달라지겠나? 무엇이 달라졌나?” “내가 이런다고 과연 변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세월호참사 이후 자원 활동을 해 오던 어떤 엄마의 하소연이다.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우선,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았나? “전에는 나와 가정 외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세월호로 인해 세상에 나왔어요.”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그렇게 변화된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변화를 포기하지 않도록 애쓸 일이다.

저들에 비해 턱도 없이 약하긴 하지만, 우리도 힘이 있다. 우리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 특히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적어도,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저들이 되지 말도록 도울 힘, 영향력은 우리에게 있다. 저들의 의도를 위해 만들어 놓은 많은 것들에 그냥 우리 아이들을 맡기지 말자. 특히, 교육!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적어도 저들을 추종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아이들이 저들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에 속하도록 하자. 거짓과 어둠과 탐욕으로 세운 기름기 도는 세상이 아니라 진리와 빛과 나눔의 담백하고 소박한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남도록 하자.

거대한 악 앞에서 의문은 계속 된다. 과연, 세상의 변화는 가능한가?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느리긴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한번 돌아보라. 많은 사람들의 헌신들, 그 헌신들이 일으킨 사건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변화다. 하지만 그 헌신과 사건 자체는 실패와 좌절로 끝나 버린 경우가 많았다, 훨씬 많았다. 그렇다. 변화는 성공보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패했다. 그 실패와 좌절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이천 년이란 시간 동안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순수한 마음으로 빛과 진리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스스럼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여 준 것처럼, 아이들이 가르쳐 준 것처럼.

세월호참사로 숨져간 이들, 특히 우리 아이들이 주저하는 우리를 부르고 있다. 좁은 길, 험난한 길이지만, 이 길은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오래된 길,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길이다. 이 길은 순수함의 길, 그래서 생명과 정의와 평화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선택하고 걸어야 할 길이다. 세상을 온통 순수함으로 물들이자.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자. 그런 움직임이, 여기 저기, 방방곡곡 일어날 때, 세월호 이후의 세상은 그 이전의 세상과 달라질 것이다. 잊지 말자. 이것이 우리가 세월호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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