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27]

조리원 넷째날

한두 시간 토막잠이라도 깊은 잠은 치유 효과가 있나보다. 점점 순조로워지고 있는 모유 수유와 더불어 차분한 심리를 되찾은 어슴푸레한 새벽녘, 거실 한편에 놓인 소파에 파묻혀 널부러져 있었다. 17호 산모가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는 마침 할 말이 있다는 양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언니, 언니! 혹시 이거 드셨어요?”

조리원에서 여러 번 나눠 준 간식인 물에 타 먹는 영양가루 스틱을 들고 묻는다.

“응, 배고파서 받자마자 먹었지.”
“언니, 이거 좀 봐요, 이거 유통기한 지난거야”
“응? 어디 봐. 에 설마. 제조일자겠지. 난 날짜 보고 신선하네 하고 좋다 했는데.”
“아녜요, 여기, 유통기한이라고 써져 있어요.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났어. 우이씨 산모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상한 음식 먹고 젖 주다가 애들한테 문제 생기는 거 아니에요?”
“헉 진짜네...으으음”
“아니 어떻게 확인도 안하고 산모들한테 썩!은! 음식을 줄 수가 있어요? 어우.”

17호 산모는 열이 나서 손부채질을 팔랑팔랑 하면서 말했다.

알고 보니 17호 산모가 이렇게 흥분한 데에는 방금 신생아실에 갔다가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자기 아기의 기저귀발진 연고가 엉뚱한 아기침대 맡에 가 있는 걸 본 탓이 크다.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무신경으로 오랫동안 치료되지 않고 있는 아기의 빨간 엉덩이를 보는 엄마의 찢어지는 심정을 헤아려 보자면 분명 그것은 신생아실 이모님들의 치명적인 실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냥 넘기기보다 추후 아침식사 시간을 활용, 만천하에 알리기로 했다.

아침 8시 정각.

‘딩동댕동~ 산모님들 아침식사 시간입니다. 모두들 식당으로 나오세요~’하는 방송에 비장하게 일어섰다. 식당에는 기다란 8인용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고 각각의 의자에는 호실번호가 수놓인 의자 등받침이 씌어 있다. 나는 115호가 수놓인 의자, 항상 그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고 보니 식당은 이미 혼란스런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앉는 테이블의 산모들에게 ‘상한 영양가루 배급 사건’과 더불어 ‘기저귀발진연고 실종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주는 족족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영양가루를 다 먹어치웠다는 14호 산모가 분개하며 바로 어젯밤 자정이 넘어서 벌어진 작은 소동 하나를 더 까발렸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14호 산모는 모유 수유에 대한 타는 듯한 열정으로 천사의 눈물을 모으는 양 한 방울 한 방울 귀히 모은 모유 60밀리리터를 신생아실에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모님 담 번에 우리 아기 깨면 분유말고 꼭 이걸 먹여 주세요’ 신신당부를 하며 말이다. 그래놓고 방에 와서 생각하니 아무래도 먹성 좋은 우리 아기 그것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어 잠도 뿌리치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유축을 하고 또 했더란다. 지칠대로 지친 몸을 겨우 가누며 휘청휘청 걸어서 모유를 전달하는데 신생아실 이모님이 아기가 방금 80밀리리터를 먹고 잠들었다고. 아, 네~하며 무심코 돌아서다 엇? 분명 아까 60밀리리터를 주었는데 어떻게 80밀리리터를 먹을 수 있지? 이모님을 부여잡고 물으니 깜박하고 분유를 타 주었다며 환히 웃으셨다고. 자신의 눈물어린 모유는 냉장고에 고이 잠들어 있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화가 식지 않아 집에서 자고 있는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억울하고 분통한 심정을 토로하며 오열했단다. 그러자 부인을 끔직이 여기는 남편이 광분해서는 잠옷바람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신생아실의 무신경한 처치를 참고 넘어갈 수 없으며 지금 당장 부인을 데리고 짐을 싸 조리원을 퇴실하겠노라고 한참을 난동을 피웠다는 것이다. 비록 화는 났지만 짐 싸서 나가봤자 당장 어디 갈 데가 없음을 깨달은 14호 산모는 욱해서 날뛰는 남편을 말리느라 힘들었다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사실 14호 산모가 그런 꼴을 당한 데는 나한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어저께 나한테 14호 산모가 물었다.

“언니, 집에 가면 조리원 있을 때가 천국이었네 한다면서요? 난 지금도 힘든데.... 벌써 집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나는 그런 걱정일랑은 접어 두라고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 여기서 마냥 편하면 집에 가서 힘들지만, 지금 좀 힘든 노선을 택하면 집에 가서는 오히려 수월할 수가 있지.”
“아니,,.. 어떻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나는 지금 열심히 애를 부둥켜안고 아이의 여러 가지 신호를 해석하고 교감하는 연습을 하면 집에 가서는 육아에 리듬이 생기면서 오히려 편해질 거라고 말했다. 나중에 꿀 같은 육아가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당장 편하다고 신생아실 이모님들의 분유 보충에 아기의 양식 주도권을 넘겨주었다간 나중에 모유 먹이느라 개고생하게 되고 모유 수유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우선 한 이틀간은 잠잘 생각도 하지 말고 열심히 젖을 주고 유축을 할 때라고 독려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17호 산모와 14호 산모와 한마음이 되어 ‘상한 영양가루 배포사건’ 진상조사에 뛰어들었다. 한 두 사람의 산발적인 항의만으로는 이 거대 조리원에 아무런 타격을 줄 수가 없으니 16명 산모 모두가 힘을 모아 대처하는 것이 좋겠노라고 14호 산모가 의견을 제시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밥 먹는 산모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조리원 실장이 출근하는 오전 9시에 거실에 모여 집단항의를 하자고 설득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예삿일은 아니라며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나는 사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궁금해졌다.

ⓒ김혜율
이 조리원은 신생아실을 무균화 한다는 목표 아래 하루 두 번 소독을 하는데 그 한 시간여 소독시간에는 의무적으로 아기를 방에 데려와야 한다. 다들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오전 8시50분쯤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결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9시가 다 되었는데도 어째 거실이 조용하다. 에라 모르겠다. 혼자라도 나가보자. 나는 하얀 싸개에 돌돌 만 아기를 안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14호 16호 17호 문이 열리며 역시나 아기를 안은 산모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다. 11호 산모는 아기를 안고 나왔다가 아기가 칭얼대자 우루루루 어르며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조용하다. 몇 호실인진 모르겠는데 꼭 나올 것처럼 했던 한 산모의 모습이 아직 안 보인다. 아기 젖 주느라 다들 좀 늦는 거겠지.... 10분 더 기다리기로 했다.

집단의 힘을 보여 줄 때

시계가 9시 15분이 되어도 모인 인원에는 변동이 없었다. 결국 우리 4명의 산모와 각자 품에 안은 4명의 아기들과 함께 집단항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조리원 실장이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본인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고 영양가루 보급은 배급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공급업체의 잘못이라고 둘러대며 사건을 축소 희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과와 대처방안을 요구하는 산모들의 원성에 사건이 더 커지지를 원치 않는 듯 바로 조리원에 비치된 모든 영양가루 박스의 유통기한을 점검했고 그 결과 다른 박스는 이상이 없으며 우리가 먹은 그 박스만 유통기한이 한 달이 지난 것을 확인했다. 실장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체 산모들에게 공개사과를 하기로 하고 사죄의 의미로 신선한 영양가루를 통 크게 한 박스씩 돌리는 선에서 이 희대의 ‘상한 영양가루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역시 뭉치면 일이 참 쉽고 힘이 되는구나.

그리고 서운하긴 하지만 탓하지 않는다. 기어코 방에서 나오지 않은 산모들. 나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으니까. ‘다들 모였을 텐데.... 굳이 나 아니더라도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어쩌면 영양가루를 한 포씩 뜯어 물에 타 홀짝대며 마실 때마다 이것이 어떻게 제 손에 들어왔는지 떠올려보다가 ‘다음엔 나도! 나만 빠지면 안 되지’ 하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 산모들이 한두 명이라도 늘어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함부로 다른 이의 인생에 깊게 개입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늘 들어온 한 산모가 아기를 안고 젖 먹이느라 낑낑대며 애쓰는 모습에 내가 가진 모든 노하우를 전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은 각자가 부딪히고 깨져야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다만 눈으로, 미소로, 그의 어깨를 따뜻하게 토닥여 주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힘내요. 시간이 흐르면 다 잘 될 거예요.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진통 중에 얼굴에 힘을 너무 준 까닭에 실핏줄이 터져 눈이 충혈 되었다는 산모가 아이를 바라보던 사랑에 가득 찬 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두가 눈물겹게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밤이다.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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