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7]


‘사이비’에 대하여 

“사이비”(似而非)란 무엇인가? 그 한자상 의미는 “비슷(似)하지만(而) 아니다(非)”이다. 당연히 ‘사이비종교’라 하면, 겉모습은 종교와 유사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될 때 쓰이는 용어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 그대로 ‘종교’와 ‘사이비종교’를 가르는 기준이 늘 모호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라고 하는 것의 본성 자체가 그 ‘비슷하지만 아님’(사이비)의 길로 나갈 가능성을 애당초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지만, 종교적 경험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 감성, 의지의 어떤 한 면보다는 이성, 감성, 의지의 총합 그 이상에 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그것을 ‘누멘적인 것’(the numinous)이라 표현한 바 있는데, 단순하게 번역하면 ‘신적인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는 ‘신비’에 가깝다. 합리성의 영역 너머에 있기에, 구체적인 현실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교 경험이 합리성의 영역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는(non-rational) 뜻이자, 때로는 합리성을 무시하는(ir-rational) 어떤 사태로 나아갈 가능성도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정-의(知情意)의 총합, 그 ‘너머’에 대한 경험의 방향성이다. 그 ‘너머’의 경험이 ‘지-정-의’와 적절히 균형을 잡고 있다면 건전한 의미에서의 ‘종교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너머’의 경험이 지나치게 강렬하면 지-정-의의 영역은 순식간에 함몰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광신의 형태로 왜곡될 수도 있는 가능성도 언제나 있는 것이다. 이 마당에 어느 누가 그 ‘비슷함’과 ‘아님’을 쉽사리 구분하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흔히 사람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행해지는 비윤리성, 반도덕성 혹은 사기적 행태에서 종교의 사이비성을 찾곤 하지만, 오늘날 종교적 문제의 심각성은 그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아주 기본적인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정도야 쉽게 구분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통의 이름을 달고 교묘하게 행해지는 모순된 종교 현실은 제대로 파악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한 단면 

이른바 개신교계 이단 종교 전문가였던 탁명환은 사이비 종교의 기준으로 다음의 일곱 가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즉, 이중교리를 가지고 있고, 교주를 신격화하며,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내지 비윤리적 행동을 하고, 기성종교를 비난하며, 교리혼합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데다가, 신도들에게 기복적 요행을 바라게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적절한 기준처럼 보인다.

역시 이단 종교 전문가라는 위고 슈탐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이비 종교는 교묘하고 꿰뚫어보기 어려운 심층심리학적 수법을 사용하여 추종자들을 허구의 세계로 끌어들여서 완벽한 예속의 굴레를 씌우려 한다. 일종의 집단 암시가 빚어내는 분위기에 현혹되고, 과장된 구원 약속에 넘어가거나 거짓 낙원에 대한 열광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능란한 선동가와 종교 이념가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른바 정통적이라는 기성종교에서 탁명환이 앞에서 말한 일곱 가지 일들이 전혀 벌어지고 있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스스로 정통이라 자부하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도 이상의 일곱 가지 기준에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기성종교도 사랑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기적 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종교학적으로 보자면, 예수의 참 인간적 측면보다는 신격화된 측면만 강조하며, 교회 혹은 집단에 따라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목사 세습 혹은 신도 성추행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도 종종 벌어지며, 타 교단 혹은 종교를 비난하는 데다가, 실상은 비정통이라고 간주하는 다른 종교적 심성이 자신도 모르게 섞여 있다. 물질적 기복적 목소리가 큰 교회일수록 대형화하는 등, 설령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기성 그리스도교회에서도 사이비와 사이비 아닌 것, 더 나아가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기는 사실상 힘들다. 그렇다면 이단과 정통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일단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풀어가 보자.

이단이라는 말 

이단(異端)의 한자의 의미는 무언가? “옳거나 바른 것(端)과 다른 것(異)”이다. 그래서 좀 기이하게 보이는 어떤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종교적 기준에 따르면 예수가 바로 이단자에 해당하는 자였다 것이다. 고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초기 그리스도교 최대의 전도자 바울로를 가리켜 “나자렛 이단(헤레시스)의 괴수”(사도 24,5)라 표현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나자렛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일컬어 당시 유대교 원로들이 ‘이단’이라 불렀다. 다음은 유대교 대사제측 법관이 바울로를 고소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 이 자는 몹쓸 전염병과 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헤레시스)의 괴수입니다. 그는 심지어 우리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사도 24,5-6)

여기서는 ‘나자렛 도당’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성서에서는 ‘나자렛 이단’이라 번역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헤레시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주로 다른 ‘당파’를 부정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되다가(1고린 11,18-19; 갈라 5,20), 점차 교회가 제도화하면서 제도 교회의 교리 내지 신조와 어긋나는 행위를 하거나 그런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 그러니까 오늘날의 ‘이단’의 의미로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렇다면, 다소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겠으나, 이단의 역사와 관련하여 현상적으로 정리하자면, 초기에는 자신들이 이단자로 불렸으면서도 거대 종교로 제도화해나가면서 새로운 이단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단과 정통의 기준은 

오늘날 신학사전상의 의미로, 이단이란 교회의 신조에서 이탈하는 행위 내지 흐름이고, 정통이란 교회의 신조를 성실하게 고수하는 행위나 흐름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신조가 과연 역사적 예수의 실상과 생동하는 인간의 삶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느냐, 또 담아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교회의 신조에서 이탈하는 것은 무엇이고 고수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 이탈과 고수의 기준을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에서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음에 이어서)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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