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

로메로 대주교(Óscar Romero)는 다음과 같이 강론을 마무리했다. “이 나라의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학대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강론을 마친 대주교가 제대로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 그에게 총격을 가했다. 대주교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1980년 3월 24일 중앙 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정부군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범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미사에는 전세계 수십만 명의 조문객들이 운집하였다.

오스카 로메로는 1917년 엘살바도르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6남2녀 형제 중에서 가장 총명했던 오스카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13세에 소신학교에 들어간 로메로는 로마에 유학하여 공부를 마친 후 그곳에서 서품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나서 귀국한 그는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사목을 시작하여 단중독 모임의 지도신부, 주교회의 비서 등을 거쳐 보좌주교에 임명되었다가 1977년 산살바도르의 대주교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매사에 신중하며 사회문제에 대해 일절 발언하지 않는 전형적인 성직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메로가 대주교에 착좌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루티요 그란데 신부가 살해되었다. 그란데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을 이끌던 예수회 소속 사제였는데 그의 활동을 싫어한 군부세력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로메로 대주교는 이때부터 빈곤 문제, 사회 불의, 불법적 살해, 고문 등을 반대하는 발언과 행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가난한 민중의 벗이 된 것이다.

정치상황이 불안하던 엘살바도르는 1979년 극우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내전에 빠져 들어갔다. 정부의 사주를 받은 무장 암살단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수많은 사제, 수도자, 선교사, 평신도, 교회기관이 테러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당국의 압력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런 사실이 잘 보도되지 않았다. 로메로 대주교는 강론, 가톨릭 라디오방송, 주보 등의 매체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고발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일각에서는 대주교를 좌파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메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물질적 해방만을 해방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이 있고, 교황 바오로 6세가 말씀하신 해방을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나는 단연코 후자에 속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진정 심오한 사회혁명은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내적 개혁에서 우러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로메로의 사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순교자이자 가경자로 추모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복자품에 올렸다. 오는 5월 23일 엘살바도르에서 시복식이 열린다. 그의 암살 30주년이었던 2010년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국가범죄에 대해 사과했다. 유엔총회는 로메로의 사망일인 3월 24일을 ‘국제 인권침해 진실 및 피해자 존엄의 날’로 지정하였다.


권은정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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