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가톨릭 신자’ 강미진 씨

‘탈북 가톨릭 신자는 333명’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민화위)가 2014년 탈북 신자의 신앙생활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에서 밝힌 숫자다. 2014년 10월 남한에 있는 탈북자 숫자로 주교회의가 계산한 2만 5000여 명 중 약 1.6퍼센트, 한국 천주교 신자 556만여 명에 비하면 0.01퍼센트도 되지 않는 숫자다.

몇몇 교구에서 신자 가정에서 탈북자가 1박2일을 함께 생활하는 ‘가정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탈북자, 더구나 탈북자면서 가톨릭신자인 사람과 만날 기회는 여전히 드물다. 자신의 탈북 때문에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 등으로 탈북 신자들 중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교회에서 활동하는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강미진 씨(데레사)는 많게는 400명으로 추정된다는 탈북 천주교 신자 가운데서도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 <데일리NK>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강 씨는 지난 4월 30일 열린 ‘주교회의 민화위 제5차 북한이탈주민 지원 실무자 연수’에 강사로 나서 북한의 최근 모습을 생생히 전하기도 했다.

회사 선배에게서 ‘종교에 너무 빠져 있다’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지만 ‘간절한 기도는 꼭 이뤄진다’는 생각으로 늘 하느님에게 매달려 살고 있다는 강미진 씨. 그가 겪은 북한과 남한 사회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함께, 신앙 이야기도 듣고자 5월 1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북한에 지인들이 남아 있는 강 씨의 상황 때문에 사진은 찍지 않기로 했다.

▲ 북한 양강도의 혜산시 모습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남한은 지상낙원이라고?
지상낙원도 몸을 움직여야 낙원”

양강도 출신인 강미진 씨는 2010년 남한에 들어왔다. 이름은 남한에 들어온 뒤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강미진 씨가 북한을 떠나게 된 계기는 보안원과의 갈등으로 ‘노동단련대’에 갈 위기에 처한 일이었다. 노동단련대는 “감옥에 가기 전 단계”라고 그는 설명했다. 공민권은 박탈당하지 않지만 무보수노동을 해야 한다. 아이를 남겨 두고 노동단련대에 끌려가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중국으로 탈출할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에 온 뒤 거의 5년. 일반 시민이 살기에는 그래도 북한보다 남한이 편하다는 게 강 씨의 생각이다. 그는 북한에서 잘살지는 못해도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이 문제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책 한 권 잘못 관리하면 그야말로 “매장”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강 씨는 “한국에서는 내가 지금 여기서 ‘대통령이 왜 정치를 이따위로 하냐’고 말한다고 누가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월 30일 강연에서 북한 사람들 중에는 남한을 동경해 “지상낙원”으로까지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서울시민이 된 강 씨의 대답은 “지상낙원도 몸을 움직여야 낙원”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치열한 생존경쟁, 끝이 안 보이는 취업난은 강미진 씨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강 씨는 곧 50대가 되는 어머니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힘들면서도 고맙다”고 했다.

북한의 최근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강미진 씨가 전한 북한의 변화는 역동적이다.

간부들에 대한 강경한 통제와 ‘공포정치’가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 일반 주민들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장성택부터 현영철까지 김정은 집권 뒤 고위급 간부에 대한 처형, 숙청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강 씨도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한 심리”를 느낀다고 했다. 한편으로 강 씨는 최근 북한에서 시장에 대한 통제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짧은 치마’나 ‘화려한 액세서리’ 등 여성 복장에 대한 단속도 완화된 것으로 본다.

세 가지 소원 들어준 하느님 향해
지금도 기도하는 이유

주교회의 민화위 조사에 따르면 탈북 신자의 절반 이상은 하나원(통일부 소속 탈북자 정착지원기관)이나 국가정보원에서 천주교를 처음 만나는데, 강 씨도 마찬가지로 남한에 도착한 뒤 ‘조사기관’에서 수녀들과 만났다고 했다.

다만 북한을 떠나기 얼마 전에 가 본 점집에서 “사람은 못 하는 100퍼센트를 하는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강 씨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세 가지를 기도했다. 중국에서 팔려가지 않도록,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끌려오지 않도록, 아이를 위해 떠나는 것이니 아이가 잘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세 가지 소원은 모두 이뤄졌고 그의 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남한 땅을 밟았다. 그때는 “참 나는 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교리를 배우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천주교의 ‘민족화해 활동’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통일이기에 준비를 해 나가야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 혼란을 줄이고 빨리 적응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일부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소외감이나 차별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면서 “그런 것을 보아서라도 민족화해 활동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미진 씨는 한반도 통일이 이뤄지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고 기도한다고 했다. 지난해 8월 광화문 앞에서 열린 시복 미사 중에도 그는 잠시 시간을 내 “나만의 기도”를 했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고향 사람들에게 “나, 한국에 와서 이만큼 성장했다. 당당하게, 나쁜 짓 안 하고, 잘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는 강미진 씨는 오늘도 그날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빈 곳과 모자라는 곳을 채워 주고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 천주교가 2012년 개최한 '통일캠프'에 참여한 신자들과 탈북자들이 함께 그린 한반도 모자이크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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