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방문하지 않을 예정


성지 교황청 대사 안토니오 프랑코 대주교

유다인과 가톨릭의 긴장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는 두 가지 조치가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황청 대사 안토니오 프랑코 대주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5월 8-15일 성지 여행 중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주 박물관에는 들어가지 않고, 다만 부속 기념관에만 다녀갈 것이라고 밝혔고, 또한 교황은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1명의 성직자를 포함한 4명의 전통주의 고위 성직자들의 파문을 철회함으로써 불거진 논란을 잠재우고자 했다.

성지의 교황 대사 안토니오 프랑코 대주교는 지난 화요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교황의 여행 일정을 소상히 밝히면서, 교황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의 박물관에는 가지 않고, 부속 기념관에만 화환을 증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청 대변인은 이것을 2000년 3월에 있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과 동일한 외교 의례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외국의 고위 인사가 이스라엘을 국빈 방문했을 때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정례이다.

홀로코스트 침묵한 비오 12세 교황에 대한 논란 때문

교황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박물관 측의 설명을 놓고 야드 바셈과 교황청 간에 계속되고 있는 논쟁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평가들은 전쟁 시 교황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침묵”했다고 비난하곤 한다. 비오 12세에 대한 논쟁으로 유다인과 가톨릭 관계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야드 바셈 박물관에 걸려 있는 비오 12세의 큰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유다인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보고가 교황청에 들어왔는데도, 교황은 말로도 서면으로도 항거하지 않았다. 1942년 12월 교황은 유다인 말살 정책을 비난하는 동맹 선언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이 로마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도 교황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교황은 전쟁 내내 중립적 입장만 고수했고, 전쟁 끝 무렵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지도자들에게 호소한 것이 전부이다. 교황의 침묵과 지도력 부재로 유럽 전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스스로의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베네딕토 교황을 포함하여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거듭 이의를 제기하고, 비오 12세도 나치의 만행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으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막후 활동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복잡 미묘한 역사적 시기의 실상을 감안하여 교황은 자주 비밀리에 소리없이 행동했다. 그것이 최악의 사태를 피하고 가능한 많은 유다인들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교황 베네딕토는 지난 9월 교황 비오 12세의 서거 50주년 기념 미사에서 말했다.

이러한 항의를 받은 야드 바셈측은 비밀리에 3월 초 비오 12세 전문가 회의를 열어 위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박물관 관계자들이 발표한 성명을 보면 아무런 변경도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역사 박물관의 주제 설명은 가장 정확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다.”라고 말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성비오10세회 성직자 파문 철회는 유다-가톨릭 관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프랑코 대주교는 베네딕토 16세가 이스라엘 성지 중의 하나인 바위의 돔을 방문하는 최초의 교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이 마호메트가 가브리엘 천사와 함께 하늘로 승천한 곳이라고 믿고 있다.

한편 교황은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성비오10세회의 회원이기도 한 4명의 전통주의 주교들의 파문을 철회한 자신의 결정을 변호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 중 한 명인 리차드 윌리암슨 주교는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실제 사건인지를 오랫동안 의문시해 왔다.

교황의 서한은 3월 11일 노련한 이탈리아인 신문기자 안드레아 토니엘리가 발표하였다.

교황은 서한에서 윌리암슨 사건이 “가톨릭 교회 안팎에서 보기 드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고 인정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윌리암슨의 견해가 파문을 철회한 실제 동기를 모호하게 만든 것은 “예기치 못한 불행”이라면서, 파문 철회는 유다인-가톨릭 관계와 홀로코스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지난 100년간 가톨릭 교회 안의 유일한 공식 분파와 일치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전통주의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의 가르침 받아들여야

교황은 “유효하게 그러나 비합법적으로 서품 받은 4명의 주교들에 대한 자비의 행위가 갑자기 전혀 다른 것으로 비쳐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화해를 포기한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교회의 나아갈 길을 거부한 것처럼 말이다.”라고 쓰면서,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화해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학적 노력의 목표”였기에, 그러한 반응이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다고 말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윌리암슨의 견해를 온라인 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교황청이 정보의 원천인 인터넷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주교들이 또 파문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직무도 행사할 권한이 없으며, 그들이 속한 성비오10세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전통주의자들은 유다교에 대한 관점을 포함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교회의 위험 있는 교도권은 1962년에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 되며, 오늘날의 사회에도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사제가 491명이나 되는 공동체 외면 못해

교황은 파문 철회의 동기를 결정 당시에 “충분히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면서도, 화해가 그 목적임을 주장하였다.

교황은 “사제 491명, 신학생 215명, 수사 117명, 수녀 164명 외에도 수천 명의 신자들을 둔 공동체를 어찌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교회에서 점점 더 멀리 멀리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두어야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넓은 아량이 인정받지 못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은 “때때로 우리 사회에는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되는 집단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사회는 그 집단을 아무 거리낌 없이 증오할 수 있다. 누군가가 - 이번 경우에는 교황 자신 - 감히 그 집단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역시 관용의 권리를 잃고, 재고의 여지가 없는 무조건적인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고 썼다.

교황은 또한 그의 조치를 비판하는 신자들을 꾸짖었다. 교황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알아야 할 일부 가톨릭 신자들까지 공격과 적개심을 거두지 않으니 슬픔을 금할 수 없다.”라고 쓰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해를 풀고 우정과 신뢰의 분위기를 회복하기 위해 애써 온 유다인들에게 더더욱 감사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3월 17일 교황은 일주일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시작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카메룬과 앙골라를 방문할 것이다. 그 다음 로마로 돌아와 성주간과 부활절을 지내고 더불어 4월 16일 82번째 생일을 맞고, 5월에는 다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 요르단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번역/김미경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09.3.11. 존 L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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