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여행 경비를 벌고자 휴학한 A씨

늦은 밤, 버스 시간이 떠서 텅 빈 거리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던 요즘이었기에, 어디 구인 광고는 없나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 생각났다. 17만 원. 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받은 돈. 꽤 큰돈인데 한 주먹도 안 되는 종이 뭉치였다. 스물 세 살 이라는, 이젠 자기 밥그릇 정도는 해결하고 살아야 할 나이라는 일종의 책임감에서 온 민망함에 급하게 구깃구깃 주머니에 넣어 버린 돈.

돈을 펼쳐 들고 생각했다. 5580원이 17만 원이 되려면 몇 시간을 일해야 할까. 30시간이네. 참 아무렇지 않게 구겨져 있던 30시간이구나. 횡재했다보다는 ‘서글프다’ 그런 감정이 몰려왔다. 떠나고 싶은 여행을 위해 돈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이 쓰이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의 돈으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던 몇몇 동기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런 게 억울하다니 난 아직 어리구나. A씨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집 근처 식당 아르바이트가 부끄러운 B씨

“어서오세요! 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손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학기 동안 배웠던 수학선생님. 날 기억하실까 싶었는데 얼굴은 기억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아르바이트 하는구나?” 선생님의 짧은 물음에 그저 “네”하고 대답했다. “서울에 있는 나름 명문대학에 입학했고 동아리 회장도 해 봤고 공모전 입상도 해 봤고 나름 빛나는 대학 생활을 하다가 본격적 ‘취업준비생’이 되기 전 잠시 쉬러 고향에 내려온 것뿐이에요”를 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 아래 뱃속에서부터 얼굴로 곧바로 치고 올라온 열기는 분명 부끄러움이었다. 5월의 평일 낮에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에 대해 선생님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개였다. 여기서 가까운 지방 대학에 진학해서 통학하는 중이거나,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사정이 있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거나. 그런데 왜?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가? 지방대학교가 부끄러운 것인가? 가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시는 테이블에 서빙을 할 때에는 최대한 ‘나름 잘나가는 대학생’처럼 보이게 노력하게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다. A와 B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취업하지 않은 20대가 생각하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 노동의 대표적인 예, 아르바이트란 어떤 의미인가.
 

▲ "식샤를 합시다2"에서 황혜림(황승언 분)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장면.(사진 출처 = tvN 홈페이지)

우리의 노동은 평가절하당하는 중이다

아르바이트는 일종의 계약이다. 계약에 의해 피고용인은 노동을 제공하고 고용인은 그것을 돈으로 교환한다. 그런데 말이 노동과 돈의 교환이지, 약속된 시간 동안 부리는 사람과 부림당하는 사람의 관계가 먼저이고 노동은 오히려 부수적으로 되는 것이 아르바이트에 대해 더 와 닿는 표현 아닌가? 고용인뿐만 아니라 식당에 오는 사람들 중에도 아르바이트생을 당연히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부리는 이가 꽤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아르바이트란 그런 것이다.

B가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B는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잘 몰랐다. ‘부림당하는 사람’으로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또 나름 명문대학생이라는 사실이 한몫 했을 것이다. 작은 동네 작은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오만함. 이렇게 우리의 노동을, 우리 사회와 고용인뿐만 아니라 노동을 하는 우리 자신조차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 안에는 직업에 대한 귀천 의식, 달고 있는 대학 간판으로 사람의 범주가 달라지는 현대판 신분제도 들어 있으니 B만을 탓할 수도 없다.

평등에 대한 의지의 산물

A는 노동에 시간의 개념도 포함하여 생각한다. 즉 노동과 시간이 돈과 맞바꿔지는 것이다. 그러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과 비교해 봤을 때 노동과 함께 쓰이는 자신의 시간이 아깝고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행 경비를 버는 A는 양반이다.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 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을 쪼개야 하고 넓은 세상을 보고 들으며 경험을 쌓고자 하는 의지도 얼마쯤 포기해야 한다. 아르바이트로 얻는 경험 또한 귀중하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취업 전선에서 나이가 많은 것은 장벽으로 작용하기에 20대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은 더 아깝고 더 억울하다.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으면서 등록금 때문에 번번이 휴학할 수밖에 없는 이가, 재수로 입학했으나 등록금을 대주는 부모님이 있어 자신과 같은 학기를 다니고 있는 이를 본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그래서 더 노동 가치가 높아진다고 말하고 싶다. 그 노동 안에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숭고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출발선은 다를지라도 도착선은 가 봐야 안다는 의지. 이 사회의 귀속되는 신분제를 내가 끊어 버리겠다는 의지. 그러니 아르바이트하는 젊은이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랫사람도 아니요, 천한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요, 가슴속에 있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땀 흘리는 의지와 열정의 산물이다. 감히 ‘갑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이렇듯이 아직 취업하지 않은 20대에게 노동이란, 스스로에게조차 평가절하 당하고 있지만 반대로 스스로가 먼저 그 가치를 알아야 마침내 고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 가치를 실현해 나간다면, 그래서 마침내 평등한 사회라는 도착선에 서게 된다면, 갑질하던 그 손님도, 종 부리듯 부리던 그 고용인도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A와 B, 그리고 노동으로 힘겨워하는 이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아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자고. 그 노동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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