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5월 10일(부활 제6주일) 요한 15, 9-17. 1요한 4, 7-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신앙인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으로부터 가지인 우리에게로 흐르는 생명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 요한 제1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1요한 4,10) 말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 주신 예수님에게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해타산을 생각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에 우리는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교정되고 구원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를 때 우리는 하느님이 두렵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준해서 상상합니다. 인류는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을 일으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운 때도 있지만, 두려울 때가 더 많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했지만, 또한 위협과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했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라는 믿음입니다. 모세는 그 믿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압제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로 표현되었습니다. 지켜야 하는 율법, 바쳐야 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이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서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그분은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일 때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요한 15,9) 그리고 복음서는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렘브란트.(1659)

그리스도 신앙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사랑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로부터 받은 유산인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하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이 이웃과의 유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 유대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성서 안에도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게 하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9,43.45)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그 사회 안에 통용되던 언어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언어를 사용하였고, 그것이 복음서들 안에 흘러들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전능과 강함은 사랑과 겸손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을 제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상대를 제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있습니다.

사랑 안에 크게 돋보이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스스로를 애완동물로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낮출 이유가 없는 곳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횡포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춘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며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그 이웃과 함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는 길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