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입에 올리기 싫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평신도는 병신도”란 말입니다. 이런 말은 이제 그만 쓰고 그만 들었으면 합니다. 평신도가 미리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피해망상적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제인지 평신도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복음적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오로지 ‘하느님 백성’만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시고, 특별히 연약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점입니다. 평(平)신도는 ‘평등한 신자’라고 고쳐 불러 봅니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주교이며, 당신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주교와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하느님 앞에 자비를 청하는 ‘죄인’이며, “더불어 복음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때마침 지난해 교황청 조직개편안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정의평화성’과 ‘평신도가정성’ 설치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평의회’에서 ‘성(省)’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회복음화와 평신도를 귀하게 다루겠다는 것이 교종의 뜻입니다.

이참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시골 성소의 사제였고,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사제 가문의 딸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알다시피 목수였던 노동자 요셉과 평범한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높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요한이 먼저 선포한 ‘나라’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요한이 죽고서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정도로 두 분의 관계는 가깝습니다.

강가로 사람을 부르는 세례자 요한, 사람에게로 간 예수

예수님은 이처럼 요한을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꼽았던 것이지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루카 7,24-25)고 하시면서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루카 7,26)이라고 전합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복음을 선포하러 사람들에게로 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요르단 강으로 불러 모읍니다. 성전 제사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서 잇속을 챙기는 성전 사제들과 달리 요한은 간단한 세례를 통해서 참회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했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이나 강가로 사람을 부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구원은 특정한 장소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냄비를 걸고 있는 천막이나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합니다. 고기를 잡는 호숫가와 산이며 들판에서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머물며 그들의 믿음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도록 돕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 중에는 그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어부, 세리와 창녀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기득권층에 밀려나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불온한 말’을 서슴지 않고 건네십니다.

예수, ‘하느님을 사랑한’ 별 볼일 없는 평신도

세례자 요한이 ‘과거 청산’을 의미하는 죄 씻음에 주목한다면, 예수님은 ‘복음의 기쁨’을 먼저 일깨우십니다. 과거의 그림자를 오래 지켜볼 시간이 있으면 미래를 향해 복음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슬퍼하고, 굶주린 이들과 더불어 빵을 나누라고 청하십니다. ‘벗을 위해 목숨마저 내 주는 사랑’만이 그분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면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저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사” 하느님 아빠에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유대교 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평신도’였습니다. 성전을 장악한 사제도 아니었고, 율법과 지식을 훤히 알던 율법학자도 아니었고, 산헤드린(의회)에서 발언권이 센 원로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몸을 움직여야 밥을 먹을 수 있고,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단함과 희망을 나누어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은 정말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고 말씀하십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만이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려준다는 뜻이겠지요. 자비행(慈悲行)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합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비(悲)는 특별히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르지 않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자비’를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 2014년 인천교구 사회교리학교 강사 과정을 수료한 평신도 사회교리 강사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복음화의 일선에 선 평신도

우리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합니다. 평신도는 ‘평등한 사랑’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의인에게나 죄인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고 햇볕을 쪼이셨던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겸손한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분은 지금 저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주교님이라서, 사제라서, 수도자라서 존경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상대의 신분에 따라 존경과 사랑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국회의원이라서, 선생님이라서, 사장님이거나 상관이라서 바치는 존경은 아침볕에 마르는 이슬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은 예수님처럼 가능한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키 작은 나무를 더 보살피고, 연약한 가지를 곧추 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쓴 게리 윌스는 체구는 작고 체력은 약하지만 영적 능력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거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실처럼 가냘프지만 활시위처럼 생기 넘치는 자그마한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예수님에게 매력을 느꼈는데, 예수님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개인적인 고통을 알 수 있었으며, “그분 내면에 숨겨진 밝은 빛은 그것을 담고 있는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짊어지고 가던 십자가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연약했고, 함께 사형집행을 받았던 다른 두 죄수에 비해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빌라도 총독마저 놀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근육질이 아니라 영적 힘이지요.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복음적 진실’입니다. 내면에 깃든 하느님의 불꽃을 지닌 이들은 연약하면서 강합니다. 뜨겁고 순정한 복음적 열정입니다. 깊게 파인 불신의 깊은 골짜기를 메워 평등한 대지를 건설하려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자녀’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미줄을 치우듯 사회적 장벽과 금기를 넘어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평신도들이 우리 교회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오로지 그분의 자비만을 믿어 용감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복음과 세상이 갈등하는 땅에서, 가장 예리하게 일상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 평신도입니다.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면서, 오늘 하루 수행하는 직업과 노동을 통하여, 오늘 하루 누구와 만나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슬픔을 나누고, 기쁨으로 함께 할 것인지 결정해야 것도 평신도의 일상입니다. 이 복음화 일선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곁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 이 글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공동체위원회 소식지 <옹기종기>에 실렸던 글을 다듬은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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