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민주화-근본적 정체성 회복의 길①

교회와 민주주의란 단어는 서로 연관 짓기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울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가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 즉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된 정치·사회·문화의 영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 다양하게, 그리고 밀물처럼 흐르고 있지만, 교회와 민주주의 개념은 별 상관이 없다라는 시각이 교회 내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시각의 저변에는 “교의(신앙교리)는 민주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의 계시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비록 교황선거가 민주주의 투표형식으로 이뤄져도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등등의 의식이 신앙처럼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와 민주주의는 절대 접목 내지 상통할 수 없는 관계인가? 그간 민주화 운동과 인권회복에 온 몸으로 투신하다가 고통 받은 신자들, 사제들의 희생은 교회와 무관한 것인가? 또한 민주주의 발전과 흐름 속에 자리한 교회는 기름과 물처럼 따로 공존해야만 하는가?

민주주의의 근본이 주권재민(主權在民) 임에 반해, 일부의 신학자들은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간의 입장에서 주권이라는 말을 감히 드러낼 수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은 인간을 위해 있고 인간을 구성원으로 존립하고 있기에, 현재의 사회적인 삶의 조건하에서 세계의 모든 이가 누리고 있고 갈구하고 있는 민주주의 개념을 전연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그 나름대로 문제점도 있지만 이보다 더 좋은 사회성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고 세계의 석학들과 지식인들은 그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인간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고, 신학도 신앙도 교회도,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존재도 없다고 본다.

필자는 신학자도 아니고, 학문하는 학자도 아니다. 지금은 평범한 농촌 벽지에서 노인 신자들과 삶을 나누는 노년기의 시골 신부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격동기의 흐름 속에서 37년간 일선 사목을 하면서 분단된 조국 남쪽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부르짖고 갈구하는 민주회복, 인권회복, 사회정의, 조국통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를 외면하지 않고 그 아픔과 고뇌의 현장에 현주소를 함께 하면서 살아온 제도교회의 공적인 사목자이다. 필자는 모든 인간의 삶을 사목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선언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 모든 사목자들과 교회의 기본 의무요, 정신이요,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회와 민주주의’란 내용의 논문이나 학술세미나, 심포지엄을 가톨릭교회의 제도권 내에서 살펴보았지만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감히 이 화두의 문제제기조차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도권의 권위 때문인가? 아니면 이 문제제기가 교권자들로부터 단죄 내지 이단시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가? 필자가 ‘교회와 민주주의’의 발제를 수용한 이유는 교회 내의 신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뇌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과 교회와 민주주의란 말이 절대 공론화 되서는 안 된다는 우민적인 고정관념의 집착을 던져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리고 최소한 사회현상과 역사의 흐름 안에 현주소를 둔 교회를 조명하면 교회 발전과 그 위상 정립에 도움이 되겠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개신교 측에서는 민주화 20년(1987-2007)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을 “민주 이후의 퇴행하는 민주주의, 퇴행하는 기독교”란 주제로 개신교 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하면서 반성과 함께 전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심포지엄은 암울한 시기에 시대의 양심, 빛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가 수구화로 돌린 이유로, 제도교회의 성장주의 편승, 그리스도 신앙의 기복주술화, 정치권과 야합한 과시적 물량화가 복음적 가치와 정신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접목된 정치권력과 미국근본주의 기독교신앙의 정치권과 야합하면서 정치권력과 뒷거래까지 하고, 민족통일운동의 대명제를 도외시하는 기득권 종교문화세력으로 안주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단이 패권주의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고, 신학자들은 목회현장을 외면한 “신앙의 게토화 현상”으로 가고 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 신학자들은 지난 20년간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주주의 개념과 신학과의 연관성을 교권선택(투표로 교단대표 뽑음)의 방법 외에는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세상과 하느님과 교회와의 필연적 연관성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교황청과 주교단의 사목교서가 계속 발표되어 왔다. 새로운 시대(Rerum Novarum, 1891년), 40주년(Qudragesimo Anno, 1937년),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년),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년) 등은 시대상황에 요구되는 복음화의 구체적인 방법과 정신을 교황이 직접 선포한 것이고, 이것은 모두 민주주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교회도 유신독재가 불을 뿜던 1971년 11월 14일에 주교단 사회사목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이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는 어느 정치 체제보다도 우월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민주주의 정부는 국민의 것이고 국민을 위한 것이고 국민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교서 10항).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권력은 올바른 자성에 따라 명령할 권한만을 갖는다”(교서 10항).

이렇게 교회 내 교도권의 가르침은 민주주의 가치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체제 안에 현주소를 두고 있는 교회는 어떻게 해서 민주주의와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민주주의와는 무관한 것인가? 비록 교의(Dogma)는 민주주의 대상이 안 된다 하더라도 교회내의 인권문제, 인사문제, 학문연구문제 등등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민주주의 정신과 맥을 같이해야 함이 시대적 요청이고 또한 공의회 정신이 아니던가?

얼마 전에 대학교수로 있는 어느 평신도와 대담 중에서 필자는 오늘 우리 교회의 쓸쓸한 단면을 보게 되었다: “제가 비신자로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인상은 아주 좋았고, 성직자들의 품위는 어느 종교인들보다도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교하여 신앙생활 하면서 가까이 접하여 본 교회제도 모습과 성직자들의 품위는 일반 사회지도자들과는 별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독선적이고, 선의의 충고나 비판까지도 거부하는 사제들의 태도, 현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없이 ‘무조건적인 신심과 믿음’을 강요하는 태도, 또 선각자적인 사명감 속에 복음정신을 안고 민주화, 통일운동에 동참하는 사제들을 냉대하고, 인사권자인 고위성직자(주교들)의 시선이 이들에게 곱지 않은 면, 또한 이성과 순리를 동반한 사회상식이 통하지 않고 민주주의 숨결인 언론의 자유가 통제되고 모든 언론 매체가 교권 권위 유지에 치중되면서 건설적인 선의의 비판까지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면을 보면서 갈등을 느낍니다. ‘교회는 싫고, 예수님은 믿고 사랑한다’는 간디의 독백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면서도 ‘쇄신’, ‘자성’, ‘거듭남’이란 화두는 계속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과 소감이 단지 한 지식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의식이 있고 사회현상과 역사의 흐름에 민감한 신자들에게도 이 고뇌와 갈등이 공감되리라 본다.

/안승길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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