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4월 26일(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와 같이 기록된 초기 신앙의 문서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말미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요한 20,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살게 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하여 남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공동체가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해석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부활로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결과였다는 그들의 믿음이 하는 해석입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친숙한 단어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인도하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삽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신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이사 40,11)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이스라엘을 돌보는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가로 부르는 시편은 말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신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다.”(시편 23, 1-3)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노래한 것입니다.

▲ 양떼와 함께 있는 목동, 빈센트 반 고흐.(1884)

초기 신앙공동체가 목자라는 호칭을 예수님에게 사용한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고 믿으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살아 계실 때,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목자가 착한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 유대교 실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회당에서 고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마르 3,5)고 전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마르 3,6)는 말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분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착한 목자와 대조하여 보여 주는 것은 삯꾼입니다. 삯꾼은 양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한 몸 살 궁리만 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을 대조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하느님은 엄하게 판단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 상상의 결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자세는 삯꾼의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셔서 자상하게 사람들을 돌보아주시지만, 삯꾼의 근성을 지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위신과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높으신 분, 두려운 분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겸손하게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면서 횡포를 부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제 질서 안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가 행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전쟁과 각종 대량 학살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와 학대로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소위 위대하다는 문화유산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그런 것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수많은 민초들이 강제 동원되어, 뼈아프고, 가슴 무너지는 사연들을 각자 가슴에 안고, 권력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였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구실만 있으면, 자신을 과시하고,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를 이용합니다. 입으로는 봉사를 외치지만, 기회만 있으면 봉사를 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말을 아끼고, 왕이신 예수님, 장차 심판하실 예수님을 즐겨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봉사한다는 사람은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삯꾼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배워 구원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오늘을 성소 주일로 정하고 신학교와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을 홍보합니다. ‘착한 목자’ 복음을 읽는 오늘을 성소 주일로 택하였습니다. 목숨을 내어 주신, 선하고 은혜로우신 한 분의 목자 밑에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하고 은혜로운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라고 권고하는 주일입니다. 신앙인은 모두 가정에서, 일터에서, 또 사회에서 스스로를 내 주고 봉사하여, 착하신 목자와 같이, 자상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 주일입니다. 삯꾼과 같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선하고 자상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도록 노력하자고 우리 모두가 마음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섬기는 생명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삯꾼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앞세우고 자기가 대우받을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고 섬기는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얽매여 사는, 속물(俗物)인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반성하고 노력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조금씩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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