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환 선생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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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초에 학급 반장인 A 여학생이 교실에서 다른 반 급우를 무차별 폭행했다.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상황에서도, 태권도로 단련된 건장한 체구의 그 학생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다른 반 학생을 흠씬 두들겨 패 버렸다. 이유인즉 자기를 무시하고 기분 나쁘게 했다는 것.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빨리 터진 폭력에 A와의 일 년이 아득해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위 ‘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던 A는 거칠 것 없이 학교를 휘저었다. 학생들에게 지시와 명령은 예사였고 교사들에게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거리를 해댔다. A를 둘러싸고 학생들 사이에 동심원의 권력 관계가 형성 되었고, 학생들은 교사의 말은 듣지 않아도 A의 말에는 복종했다. 학년 부장이 특별히 이 학생을 부탁한다며 내게 배정했다지만, 나로서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담임인 나도 학교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한 달간의 위탁 봉사 교육에 동의하고 각종 후속 조치에 들어갔다. A의 어머니는 피해 학생과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내게도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피해 학생과 어머니도 학교의 결정을 받아들였기에, 나와 A의 어머니는 인근의 사회단체에 데리고 가서 위탁 교육을 맡겼다.

그러나 담임인 나는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몇몇 교사는 강제전출 같은 강한 징계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불만을 내게 말했고, A의 아버지는 오히려 징계가 지나치다며 내게 불만을 제기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그만한 일은 다반사인데 반장 자격 박탈까지 이루어진 징계가 지나치다는 아버지의 항의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가운데 A 학부모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늦은 시간까지,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은 부모의 거울

A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강압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워 아내와 자녀에게 오랫동안 언어폭력을 일삼았고, 지나친 적대감으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어머니에 따르면 아버지 역시 자랄 때 받은 깊은 상처가 있다며 내게 말을 아꼈다. A의 아버지는 자신의 뾰쪽한 감정을 주변에 덧씌웠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심하게 상처받고 있었다.

학생들의 일탈은 대체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결핍감, 자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억압된 감정에 뿌리가 있다. 이런 결핍감이 적대감이 되고 이것을 학교에서 약한 친구에게 내쏟곤 한다. 이때 결핍감이란, 이혼이나 가난처럼 가정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혼이나 가난이 자녀에게는 힘들겠지만, 부모의 믿음과 지지가 있다면 아이는 크게 일탈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혼과 가난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 즉 부모가 자기 삶과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친구 때문도 아니다. 폭력학생의 부모들 중 상당수는 자녀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며, 마치 처음부터 문제학생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문제학생은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을 따름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충족받지 못한 결핍감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어울렸고, 그렇게 서로의 결핍을 나누다가 더 일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라는 부모는 자기문제를 회피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뿌리는 대체로 부모에게 있다. A는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 했고 특히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한다며 하염없이 눈물범벅이 되어, 자기 고통을 토해 내곤 했다. 사랑받지 못한 고통이다. A가 급우들을 이끌고 위세를 부리는 것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한 허세와 위악일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억압된 감정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딱 그 방식으로, 친구에게 반복하고 있었다.

학교로 돌아온 A는 예전과는 달리 언행에 주의했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이끌고 교사와 갈등했다. 내가 중재하고 개입하며 일 년을 버텨 갔지만, 그는 자주 폭발했다.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아이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A는 사고를 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온갖 변명을 끌어댔지만, 결국은 자신도 모르게 그랬다며 죄송하다며 온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이에 동료 교사가 ‘A가 어떻게 당신에게는 다소곳한지 궁금하다’며,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도 했다. 글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A의 마음을 물어보고 들어주는 시간을 가졌을 따름이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그의 마음을 듣고 들어주며, 그가 조금이라도 정화되기를 기다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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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교사는 학생과 자주 갈등했다. 그날도, 손톱 매니큐어를 칠하고 교복도 반듯하지 않다고, 자기 반 C학생을 심하게 다그쳤다. 아이의 몇 마디 대꾸에 그 교사는 학생이 버릇없게 군다며 더 격하게 질책했고, 급기야 ‘너 같은 게 무슨 학생이냐!’며 고성을 지르며 아이를 교무실 한쪽 벽으로 밀쳐 심하게 몰아세웠다. 학생은 ‘왜 이러는 거냐’며 울부짖었고, 교사는 어디에서 덤비느냐는 맞고함으로, 교무실은 처참해졌다.

그런데 학생을 돌려보낸 뒤, 그 불똥이 내게 튀었다. B교사는 자신의 학생지도가 힘든 것은, 내가 학생지도에 협조해 주지 않아서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말인즉, 그 C학생이 ‘옆 반 선생님(나)은 그러지 않는데 왜 선생님(B)은 그러냐’며 교사의 지도 방식을 비교 문제 삼은 것이었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다.

나는 학생이 매니큐어를 칠해 오거나 교복이 단정하지 않을 때, 학생에게 시간을 주었다. ‘학교 교칙이 있으니 언제까지 수정해 올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개의 학생들은 하루나 이틀 뒤까지 약속을 실행했다. 그래도 매니큐어를 지우지 않았다면 ‘나름 예쁘지만 약속대로 지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이 마음을 받아 주고 준비해 둔 아세톤을 주면, 학생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지우고 서로 멋쩍게 웃는다.

학생에게 시간을 주면 학생은 부드러워진다

학생이 매니큐어를 칠하거나 교사의 지시를 바로 수정하지 않는 것은, 교사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온갖 규칙을 지키기 귀찮을 때도 있을 테고, 또 자기생각에 빠져 살짝살짝 위반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사도 살짝살짝 가볍게 대응하면 그것으로 대부분 해결되었다. 가끔 격하게 반응하는 학생도 있지만, ‘나름 힘든 게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고 기다리면 대개의 아이들은 수그러든다. 교사가 조금만 받아주면 아이들은 쉽게 부드러워진다.

B교사가 내게 요청한 협조란 어떤 것일까.... 매니큐어를 지우지 않았다고 ‘너에게는 아세톤도 아깝다’며 칼로 바로 긁어내라고 해야 했을까. 교복이 반듯하지 않다고 ‘너 같은 건 학생도 아니’라며 차가운 바닥에 무릎 끓게 해야 했을까. 자기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네가 나를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몰아세워야 했을까.

B교사는 나를 학생 지도를 하지 않고 교칙을 지키지 않는 교사, 학생에게 인기 정책을 구사하는 교사라 했다. 말 많은 그 여교사는 내가 해명할 가치도 없는 말들을 주변에 흘리며 다녔고, 급기야 나를 비난하는 내부 메일을 내게 보내기도 했다. 자기결핍과 적대를 온 학교에 뿌려대고 있었다. 학교폭력에 학생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도 다반사이고, 그리고 교사가 교사에게 폭력적일 때도 있다.

학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고 여러 방안이 쏟아졌다. 학교마다 상담 교사와 담당경찰이 배치되었고, 전반적인 감시 기능도 강화되었다. 교사의 인식도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내 아이가 학교폭력에서 완전히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감시 기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소소한 폭력에 노출될 수도 있고, 더구나 교사의 언어폭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학생이든 교사든 폭력적인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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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사라고해서 교사의 폭력을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교사의 폭력성이 학생의 폭력성을 강화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데 학생을 결정적으로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부모의 든든한 정서적 지원을 받은 아이는, 교사가 폭력적 언사를 하더라도 크게 휘둘리지 않고, ‘이상한 선생님이네!’하며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자기들 방식대로 비껴간다.

나는 개인의 고통과 억압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 왔다. 그래서 학교폭력의 사회적 원인과 해결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학교폭력의 사회학과는 별도로 내 자녀를 지킬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의 사랑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부모와의 관계가 모든 것의 뿌리다. 그런데 학생들과 이야기하다보면 가족의 이름만큼 쉽게,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관계가 또 있을까 싶다.

▲ KBS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에서 주인공 옥림이가 가족의 지지를 받는 장면.(사진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부모에게 상처 받는 아이들

어버이날 학생들에게 부모님께 편지 쓰기를 하면서 부모님 이야기를 하다보면, 많은 아이들은 눈물 흘린다. 감사한 마음보다는 대개 서러운 마음에 울곤 했는데, 나는 바로 그 마음을 글로 써 보자고 한다. 아이들의 상처는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오랜 교직 생활에서, 나는 자녀를 미워한다는 학부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모두 자녀를 사랑한다 했지만, 그 수많은 사랑에 왜 수많은 아이들이 상처받고 쓰러지는 것일까. 그렇게 상처받아, 몇 년 전의 D는 친구들과 동네를 떠돌다가 학교를 그만 뒀고 E는 가출을 반복했다. 어느 학교에서든 이런 사례는 특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이 흔한 일이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자기 존재가치를 항상 인정받으면서 성장하고 싶어 한다. 교사의 한 마디에 쉽게 감동하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하물며 부모에게 받은 사랑과 상처는 얼마나 크고 깊겠는가. 그래서 가장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과 교육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 자존감이 낮아진 학생이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에 쉽게 휘말려 든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별 뜻 없이 던진 한 마디에도 쉽게 흥분하고 격한 말들을 쏟아내는 교사 역시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병든 부모는 자녀를 어디에서나 지옥으로 이끈다.

그럼에도 만약 교사에게 허락된 것이 있다면,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을 보충해 주는 것, 이것이 교사가 학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일 테다. 교사는 부모가 채워 주지 못한 믿음과 지지를 보충 대리하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어디에나 학생의 고통이 넘쳐난다. 그러나 문제 학생은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고, 덧붙여 문제 교사가 있을 따름이다. 죄는 우리 어른들이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휘두른 학생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학생은 자기 행동의 책임을 배워야하고 피해학생은 당장 학교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모와 교사가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기 전에 그들 고통의 뿌리, 그 고통의 질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A의 마음을 받아 줄 공간을 마련했을 뿐

졸업식 날 A가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내게 긴 편지를 주었다. 자신의 지난 학교생활과 여러 마음을 빼꼭히 적어 놓았다. A가 한 때의 격한 강물을 헤쳐 나가는 동안 내가 했던 일이란, 그의 마음을 받아 줄 공간을 마련해 놓은 정도였는데 그런 내게 감사하다 했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공간을 둔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쯤이 되겠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지켜보고 기다리며 받아주는 것이라고 할까. 어쩌면 사랑이란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A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배운 것은 나이기도 했으니까, 나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A의 졸업을 지켜봤다.

 

 
 

황주환 교사
경북 작은 읍의 중등 국어교사로, ‘가르친다’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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