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오늘부터 매월 둘째 월요일에 숙명여대 재학생 변지영 씨가 청년의 입장에서 본 젊은이의 현실과 사회, '지금여기 청춘'을 씁니다. - 편집자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 속에서 상실된 인간성 회복을 위해, 신앙을 통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청년 사도의 모임.”

작년 11월,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을 맞아 가톨릭 학생회의 정체성을 이 시대에 맞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시도가 있었다.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 기념 팍스제’(이하 팍스제) 기획단이었던 서울대교구 약 열 명의 학생들은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청년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이 무엇인지 논의했고 이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결국 이 슬로건은 발표되지 않았다. 발표할 수 없었다. ‘공감’의 문제였다. 얼마나 많은 기존 회원이 이와 같은 정체성에 동의할 수 있는가? ‘현실’의 문제였다. 진짜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실현할 수 있는 슬로건인가? 학기 초에는 새내기를 맞이하느라 바빴고 여름에는 농활을 가느라 바빴다. 시험과 과제가 있었고 가을에는 성지순례를 떠나야 했다.

청년은 낙인이 두렵다

또한 소신 있는 단체가 아니라 낙인찍히는 단체가 될까봐 겁났다. 사실 명시적인 정신이 행동력의 바탕이 된다는 의견 아래에 최대한 구체적인 단어를 쓰자는 전제가 있었다. 원래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 당시까지 우리 사이에서 논의된 사회문제의 원인은 명백히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와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진한’ 표현은 피해야 했다. 보다 넓은 대표성을 갖추기 위함이라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도드라지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단체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단체에 신입회원이 들어오긴 할까? 긍정적 대답이 어려웠다.

논의 과정 끝에 새로운 정체성 발표는 무산되고 한 성경 구절이 팍스제의 주제 성구가 되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 15) 성구로 대신하니 확실히 공감대 형성에도 긍정적 효과가 있었고, ‘덜 진해서’ 거부감을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편의 아쉬움은 가시지 않았다. 왜 우리는 삶의 성찰에서 나온 가톨릭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당당히 제시하지 못했는가. 우리가 문제였을까, 이 시대가, 사회가 문제였을까. 난치의 병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팍스제 준비 과정에서 우리 시대 젊은이와 젊은이를 대하는 사회의 허약한 바닥이 드러났다.

▲ 2014년 11월 8일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시된 가톨릭학생회 재학생 회원들의 고민.ⓒ정현진 기자

불안의 물레방아를 지칠 때까지 돌린다

청년은 바쁘다. 다들 바쁘게 산다. 무엇으로 향하는 바쁨인가? 모르겠다. 한가한 고민할 시간에 그냥 바쁜 것이 덜 ‘불안’하다. 청년기의 변함없는 속성이자 우리 세대가 특히 더 절감하는 불안.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실의 근원이 되었고 우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그런데 그 발전이란 것이 물레방아처럼 다시 돌아와 더 큰 불안을 가중시킨다. 모두가 발전하는 가운데 그만큼의 발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제 더 큰 물레방아를 돌려야 하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돌고 돌아 지쳐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더 발전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학에서는 전공 하나 열심히 파는 것만으로는 불안을 극복하지 못한다. 영어로는 부족해서 다른 외국어를 찾아본다. 일찌감치 물레방아 쌓아 올리기를 포기하고 입학하자마자 고시촌으로 뛰어드는 학생들도 꽤 많다. 그러다 문득 ‘왜’라는 질문으로 돌아갔을 때, 무엇을 위해 이렇게 피 튀기는가를 물었을 때, 오히려 뭐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이 돌아온다. 마치 가톨릭학생회가 매년 행사를 치르고 매뉴얼을 계발하며 겉으로 그럴듯한 단체가 되어가는 반면에, ‘그래서 이곳은 무엇을 위한 곳인가요?’라고 물으면 난처해지듯. 그게 지금의 우리다.

청년은 낙인이 두렵다. 그건 공들여 쌓은 물레방아마저 못 쓰게 만드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누가 그런 걸 만든 것인가? 우리를 뽑아서 쓰는 기업일 수 있고 대중의 편 가르기일 수도 있고 본질을 잃은 언론일 수도 있다. 광화문 광장에 추모 미사를 봉헌하러 가자는데 한 후배가 불만이었다. 요지는 자신에게 낙인이 될 수 있는 신념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톨릭 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한 이력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른다는 선배의 조언이 있었다. 기업에서 운동권으로 오해하고 부정적 평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푸른 날을 누릴 수 있을까

그 후배의, 선배의 가냘픈 줏대가 애처롭기 전에 소신 지키기가 이렇게나 어려워졌나, 사회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 속에서 인간성이 상실됐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그것의 부작용이 사람보다 돈이 위에 있는 가치전도 현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복음적이지 않다. 스스로를 청년 사도라 일컫는 가톨릭학생회는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삶과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헌데 이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니 누군가로부터는 낙인이 되어버렸다. 팍스제 기획단의 해결책은 낙인을 들이댈 수 없는 성역인 성경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것이 과정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국엔 무엇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각자의 물레방아를 즐거운 순간으로 채워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허약한 개인과 사회의 기반에서 샘솟는 낙인들이 사라진다면, 그 와중에 굳건한 소신이 있다면, 가려내고 채워 나가는 인생 말고 그저 자기 자신을 따르며 살아도 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안의 물레방아란 우리의 문화, 우리의 교육에 깊이 뿌리박힌 채 만들어진 것이어서 끊어 내기가 참 쉽지 않다. 변명이지만 사실이다. 그게 현실이다.

청년인데, 우리는 분명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데 자꾸만 움츠러들고 눈에 띄지 않으려 빛을 버리기까지 한다. 푸른 나이 청년(靑年). 다가오는 계절처럼 우리의 푸름도 되살아났으면. 오늘도 덜거덕 덜거덕 도는 물레방아 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푸른 매미 소리로 덮일 그날을 그려 본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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