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존재에 참여했던 예수는 교회에 부재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그렇다 비단 보이는 꽃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의 존재에 참여하기 전에는 그는 없다. 그는 不在하다. 자기 존재의 부재.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소외고 그것은 절망의 끝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부재를 경험하곤 한다. 천덕꾸러기 학생이 교실에서 자기의 존재가 부재함을 본다. 여자들이 가정에서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부재를 발견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은 이러한 부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더 이를 수 없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수두룩하다. 사회적으로는 비정규직이 그렇고 노숙자가 그러하며 노점상들이 그러하다. 성적 소수자가 그러하고 약을 물고 죽어가는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여성들이 또한 그러하다.


어디 그 뿐이랴, 가정에서도 그렇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비약해서 말한다면, 작년 이맘 때 나는 참으로 착하고 어진 여성분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물었다. '누구'냐고. 그 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니 자신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할 것이 없었다. 그 분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에서 그분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이름 '아무개'를 부르면 오히려 당황하게 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에 불안하게 된다고 말한다.

“너 누구냐?”

스스로 그렇게 하였을까? 아니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사람들,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또 이 분들로부터 권위를 위탁받은 사람들이 가정이건 국가건 사회건 종교건 조그만 공동체이건 이 분들의 존재를 비웃고 조롱한다. “그냥 계시라”고. 왜 <기방난동사건>이란 영화에 나오지 않았는가? “넌 생각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해.” 건달을 부리던 악질적 배후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비단 이보다 사소한 일에서도 그렇게 산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존재가 없다. 그저 부모가 만들어 놓은 그들의 미래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 그 아이들의 인생은 없다.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그렇게 하고, 선생이 제자를 향해 그렇게 하고, 작은 모임들에서도 그나마 쥐꼬리만한 권위를 내세워 그렇게 하고, 또 정치인이 국민을 향해 그렇게 하고, 종교 지도자가 교인들을 향해 그렇게 하고, 신문 사주가 독자를 향해 그렇게 한다. 그래도 괜찮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비존재의 조롱을 감수한다. 그곳에는 윤리도 도덕도 수치심도 없다. 그 편이 속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다. 허허벌판에 홀로 세워진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복종하고 굴복하는 편이 마음에 편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할 것인가.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나만 왕따 당하기 싫은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비굴한 일상에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온다. “너 누구냐?”고. 묻지 말아주길 그렇게 바라건만 그는 내 인생 한복판으로 걸어오면서 묻는다. “도대체 너 누구냐?”고. 그 음성을 일컬어 예수의 독설이라 읽었다. (김진호, <예수의 독설>,도서출판 삼인 참조)


예수는 이렇게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온다. 마르코 복음 5장, 게라사 지방에 한 광인이 산다. 제 몸을 돌로 찧고 아무튼 별 짓을 다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 안에 악령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가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는 대답한다. “군대(레기온-로마군대)”라고. 중요한 것은 그때 까지 아무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름 뿐 아니라 나이, 고향, 사연 등 그의 인생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위험인물로 단정하고 누구도 해친 적이 없는 그를 무덤가에 몰아놓고 방치했다. 아니 배제한 것이다.

예수는 교회에 부재한다

두려움에 떤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였다. 존재하지만 부재한 자. 이 광인이 겪은 소외의 배후에는 부당한 권력이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좀 정치 사회적이다. 그리고 종교적이다. 아무튼 이 광인을 배제하는 것. 비존재로 단정하는 것의 배후에는 권력자의 음험한 계산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호출은 그를 공동체 안에서 겪는 부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존재가 너무도 힘든 자들에게 애써 존재를 강변하는 예수는 그러므로 독설이다. 그것이 너무도 험난한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는 부재한 자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조차 이 사회에서 존재하되 부재한 자들의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그저 '사랑'이라고 뭉뚱그려진 이상스런 기호만 들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목이 메는 서러움을 느끼며 그들의 존재에 참여했던 예수는 교회에 부재한다. 용서할 수 없는 분노와 늘 눈물이 아니고는 살수 없던 예수의 삶이 부재한다.

나는 요즈음 어느 곳에서도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사제를 보지 못한다.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무지 슬퍼서 잠 못 이루는 사제들을 보지 못한다. 치미는 분노에 벌벌 떨며 가슴을 쓸고 있는 사제 역시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부재하는 자들의 인생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사랑하라고 외칠 뿐이다. 이 사제들의 인생에 그들의 존재가 없다.

그렇게 사람을, 존재를, 그러나 사회에 부재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담지 못하는 교회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교회에 예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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