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 세무 협약

바티칸은행은 지난 수십 년 간 신비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4월 1일 교황청과 이탈리아가 합의한 세무협약은 자금세탁과 탈세 창구라는 이미지를 떨치려 노력하는 이 조직에 변화하는 시대의 징표다.

이 협약에 따라 양측은 앞으로 재정과 세무 정보를 공유한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은행을 청소하려는 여러 개혁조치의 하나다. 그동안 이 은행은 부유한 이탈리아인들이 세금을 피하거나 불법 활동을 하는 창구로 인식되어 왔다. 이 조직의 원래 임무는 가톨릭교회와 산하 자선조직들이 세상에 봉사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필요한 은행 업무를 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은행이 청소 작업을 추진하는 동안, 여기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지난 2013년 4월에 바티칸은행이 엄청난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시작한다. 추기경들은 잇따른 추문을 처리하느라 쉴 새가 없었고 “하느님의 은행”은 다른 은행들로부터 신뢰와 인내를 급속히 잃어 가고 있었다.

프로몬터리 파이낸셜 그룹이라고 부르는  미국의 유력한 경영자문기업의 파트너인 엘리자베스 맥컬은 돌직구를 날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티칸은행의 로날도 슈미츠 임시은행장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을 때 이 은행이 21세기에 걸맞고 너덜너덜해진 명성을 되찾기 위해 그의 회사가 해 줄 수 있는 “아주 힘든” 하지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설명해 줬다. “프로몬터리”라는 이름은 추문에 빠진 여러 은행들을 구해내면서 얻은 명성이었다.

이 자리의 대화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에 따르면, 슈미츠의 대답은 “됐어요, 우리는 (이미) 문제없어요.”였다. 하지만 사흘 뒤, 맥컬은 바티칸에 가 있었다. 새로 바티칸은행장이 된 에른스트 폰 프라이베르크가 그녀를 로마로 불렀기 때문이다.

맥컬은 9.11사태 뒤에 뉴욕의 은행들을 감독하며 뉴욕의 은행들이 안정되도록 도운 인물이다. 그리고 프라이베르크 은행장은 독일 귀족으로 변호사였다. 프라이베르크는 바티칸은행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맥컬의 자문회사를 고용하기로 결정했고, 그 뒤 48시간 안에 프로몬터리 회사는 25명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었다.

바티칸은행 대변인인 막스 호헨베르크는 <가디언>에 “폰 프라이베르크는 맥컬에게 ‘당신은 내게 남은 마지막 총알이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단순히 일을 맡긴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이해했다. 가톨릭교회의 한 기관이 도와 달라고 외치는 호소였다.”

그리고 실제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로, 프라이베르크는 이 자문 팀에게 자신의 의전실을 내줬다. 자문팀은 은행 선물거래실과 비슷하게 책상을 줄지어 배치하고 엄청난 양의 전산 자료와 서류 자료를 꼼꼼히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라틴어로 돼 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바티칸은행장에는 프라이베르크의 후임자가 들어섰고 프로몬터리 회사는 800만 유로(95억 원)를 받은 뒤 짐을 챙겨 떠났다. 바티칸은행이 눈에 띄게 변모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기에 이뤄진 여러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교황 직무의 핵심에 투명성을 뒀다. 해마다 2회씩 회계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에서부터, 미국, 독일, 영국과 재정협약을 체결했고, 두 명의 전 바티칸은행 임원과 한 명의 변호사를 부동산 사기 거래 혐의로 공개 고발하는 데까지 여러 조치가 잇따르며 개혁 노력이 진실한 것임을 보여 줬다.

미국의 독립 가톨릭언론인 <NCR>의 선임 분석가인 토머스 리즈는 “사상 처음으로 바티칸은행에는 교황청에 우호적인 인사가 아닌 진짜 외부 감시인을 두게 됐다”고 지적하며, “바티칸은행을 더 투명하게 하려는 데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미국 국무부도 2014년의 한 보고서에서 프로몬터리 회사가 주도한 변화들이 자금세탁을 “막고, 저지하고, 식별하고 처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국무부는 아직도 자금세탁에 관해서는 교황청을 “우선 관심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나라가 바티칸은행에 축복을 줄 생각은 아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엄격히 말하자면 바티칸은행을 감독하는 위치는 아니지만, 바티칸은행 측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2009년에 사실상 모든 이탈리아 은행에 바티칸은행과 거래를 중단하도록 강제했다. 교황청이 자금세탁을 막을 적절한 절차를 실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바티칸은행은 여러 개혁을 했지만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탈리아 중앙은행의 한 관리는 <가디언>에 “협력과 정보 교환을 하는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면서, “방향 자체는 전환됐으나 우리 앞에는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바티칸은행의 독립감사기구로 설립된 교황청 재무정보국의 르네 브뤼하르트 국장은 “이탈리아 감시당국, 즉 이탈리아 중앙은행과 건설적 대화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스위스인이다.

바티칸은행은 이제는 프로몬터리의 도움으로 다른 주요 은행과 대등한 수준의 은행 준법 프로그램과 감독 구조 등을 갖춘 상태라고 주장한다. 물론 바티칸은행은 다른 은행과는 다른 고유한 업무가 있는데, 세계 각지의 저개발 지역에서 일하는 수녀나 성직자들도 은행 고객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에는 제대로 된 자금이체 법규를 갖춘 은행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보기를 들자면 수단의 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로마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티칸은행은 그간의 고객 중에서 교황청과 직접 연관 관계가 없는 개인 고객은 모두 계좌를 없앴다.
이러한 개혁 작업 내용을 잘 아는 한 소식통은 “그것은 청소 작업이었다”고 했다. 바티칸은행은 2013년에 약 3000개의 계좌를 폐쇄했다. 대부분은 오랫동안 안 쓰이던 휴면계좌였기 때문이었지만, 약 400개는 이사회 차원의 결정을 거쳐서 폐쇄했다.

맥컬은 가톨릭 신자이고 자녀 일곱을 둔 엄마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을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교황청 안의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머물 때 그를 (멀리서) 보기는 했다. 지금 풀어야 할 문제를 늘 상기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에 선출된 뒤 이전의 교황들이 숙소로 쓰던 교황궁 안의 아파트를 선택하지 않고 교황청을 방문하는 고위성직자들이 머무는 검소한 게스트하우스인 성녀 마르타의 집을 자신의 숙소로 정했다.

바티칸은행의 역사

▲ '하느님의 금고지기' 로베르토 칼비에 대한 책의 표지.(사진 출처 = freemasonrywatch.org)
바티칸은행은 세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42년에 설립됐다. 당시 이 은행은 가톨릭교회가 가진 어마어마한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할 안전한 장소로 여겨졌고, 가톨릭교회가 자금을 세계 각지에 보낼 수단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이 은행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여러 폭로 서적에서 이 은행은 마피아와 연계가 있으며 돈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세금을 떼 먹는 것을 돕는다고 고발했다. 특히 아무에게도 보고하지 않는 주권지역에 그들의 돈을 예치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은행을 둘러싼 미스터리들은 1982년에 이탈리아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의 주검이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검은 수사) 다리에 매달린 채 발견되면서 커다란 추문이 되었다. 그는 로마와 바티칸에서 “하느님의 금고지기”로 통하던 인물이었다. 수사관들은 그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있는 마피아 조직에게 살해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건은 암브로시아노 은행이 파산한 뒤 일어났는데, 바티칸은행은 이 은행의 주요 주주였다.

그러나 그 어떤 논란보다도 더 바티칸은행의 개혁을 강요한 것은 바로 9.11테러 사건이었다. 미국은 테러를 막기 위해 불법 자금의 이체와 예치를 방지, 감시하는 국제적인 은행체제를 강화시켰는데, 바티칸은행은 이러한 요구를 계속해서 무시했다. 그러자 결국 바티칸은행과 제휴해서 송금 업무를 해 주던 다른 은행들은 바티칸은행과의 거래를 끊기로 했고 결국 바티칸은행은 자신의 업무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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