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4월 5일(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사도 10,34.37-43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느 생명과 같이, 예수님도 죽음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12,46). 이 세상의 믿지 않는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모두가 절망의 어둠 안에 있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해 달리는 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빠릅니다. 그는 무덤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줍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 부활절 아침, 모리스 드니.(1891)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이 아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그분이 사셨던 삶에 대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빈 무덤만 남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고,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예수님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사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죽여 없앴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에게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령, 곧 당신의 숨결을 주셔서 예수님이 좋은 일, 살리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을 받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절대적인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의 참의미, 자유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주신 인간의 생명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얽매이고, 우리의 명예욕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킨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신앙인의 길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관찰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그런 삶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유대교의 관행에 얽매이지도 않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이 말하던 병자들을 그 병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라고 초대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신 실천들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과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높여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면서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실천, 고치고 살리는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 안에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읽어냅니다. 그런 신앙인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우리가 하는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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