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쇄신]

  

사진/고태환

 누나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발목수술을 하고 누워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여덟 명이 함께 쓰는 병실에서 누나는 그야말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집에서도 텔레비젼을 잘 안보고 사는 누나가 함께 입원해 있는 다른 분들이 종일 켜 놓고 보는 텔레비젼 소리를 참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나의 병상은 텔레비전 화면이 전혀 안 보이는 창가 쪽에 있었다. 사실 그럴 때는 보기 싫어도 차라리 함께 보는 쪽이 훨씬 견디기 쉬운데 누나는 그게 잘 안되는 모양이다.

책읽기와 음악듣기가 취미인데 읽을 책이 없다며 투덜대는 누나를 달래느라 이 얘기 저 얘기 재미있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마음을 썼다. 누구나 몸이 아프면 신경이 곤두서게 마련이고, 병실도 공동체 생활이기에 타인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뿐 아니라 다들 그랬다. 텔레비젼을 보는 분들은 조용히 보고 있었고, 찾아온 가족이나 손님과 담소를 나누는 분들도 다소곳했으며, 간간히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분도 옆 사람에게 방해가 안 될 정도로 가만가만 말했다. 그렇게 비록 여덟 개의 침상으로 나뉘어 있지만 한 병실 공동체인 우리는, 100%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 공존의 평화로움을 깬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 공동체 일원도 아니고 이 병실공동체의 조화로운 평화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도 할 일도 없으며, 더구나 모두의 작은 노력으로 힘들게 가꾸어진 이 평화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참아낸 일이 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이방인인 특진 담당 의사였다.

그는 병실에 들어올 때부터 어떤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이를테면, ‘안녕들 하세요? 오순도순 좋은 말씀 나누고 계시는데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특진을 맡은 환자분과 나눌 말씀이 있거든요.’ 라고 예의를 갖추고 들어오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인가? 모든 예의를 거절한 채, 거만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걸음걸이로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자신의 특진 담당 환자분께 이것저것 묻거나 지시를 해댄다.

침상 머리맡에 붙은 이름표에 엄연히 새겨진 만71세 어르신에게 하는 말투에도 공손함이란 전혀 없었다. ‘부족한 나를 신뢰하여 내게 특진을 맡겨준 이런 고마운 환자분들이 계시기에 내가 따뜻한 밥을 먹고 편안한 잠을 자고 있으며 계속 의학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참으로 고맙고도 고맙다’ 같은 심정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최상의 의술을 자랑하는 우리 대학병원에 와서 최고인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디에서 이런 의료 혜택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또한 내가 아무 데나 가주는 사람인가? 나만큼 이름 있는 특진의사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저기 가준단 말인가? 필요한 사람이 당연히 찾아와야 맞지만, 수술을 하고 잘 움직일 수 없어서 여기까지 와준 것이니 한없이 고마워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이런 심정이 표정과 몸짓에 가득해 보였다.  

사진/고태환

 어쨌거나 자신의 환자 앞에 선 의사는 스스로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유의 말투인, 퉁명스럽기도 하거니와 상대의 연령이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의 끝을 뚝뚝 잘라먹는 지극히 잘못된 언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하고 있었다. 바로 옆 침상 곁에서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몇 마디를 그렇게 주고받던 그는 드디어 그가 최소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가 버렸다. 대각선 쪽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주고받다가 걸려온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는 다른 환자를 향해서 신경질적으로 이렇게 쏘아 붙이는 것이 아닌가?

“거 좀 조용히들 하세요! 시끄러워서 말을 못하겠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왜 우리가 조용히 해야 하는가? 객관적으로 시끄럽지도 않았고 또한 그의 회진에 전혀 방해되지도 않았다고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설령 방해가 될 정도로 시끄러웠더라도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병실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 함께 지내는 일부 환자의 회진을 하러 온 의사인가? 정당하게 병실 비용을 지불하고서도, 함께 하는 불편함을 아픔을 참아내듯이 잘 참아내면서 서로를 위해주며 지내고 있는 환자공동체인가?

그는 과연 누구로부터 무슨 권한을 받아서 자기가 얘기할 때는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야 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인가? 신체의 일부가 불편한 환자에게는 나이나 사회적인 경험과 지위에 관계없이,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갇힌 수용자들에게 하듯 함부로 취급하고 말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는가? 수용자들에게도 사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는가? 하물며 병원 재정을 대부분 책임져 줌으로써 의사 자신의 생계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고마운 분들에게 어떻게 그런 대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주객전도도 유만부동이요 언어도단의 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저 말씀 나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회진 중인데요. 제 환자와 나눌 얘기가 있어서 양해를 좀 구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작게 얘기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방해가 되신다면 어렵더라도 제 환자를 모시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진/고태환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 착하기도 하다. 아무도 그런 불만의 심정을 불평으로 표현하는 이는 없었고, 다들 그 의사의 눈치를 보면서 말소리나 통화소리를 조금씩 더 줄였다. 그 전에 이미 충분히 작았기 때문에 더 줄여도 별로 표시도 안 났지만. 어쨌든 약간 주눅들은 척 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자기 할 말을 다 마친 그는 미안한 표정이나 따뜻한 인사 한 마디는커녕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환자에게 부드럽거나 온화한 눈빛 한 번 건네지 않고, 예의 거드름 가득한 걸음걸이로 찬 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똘마니들처럼 굽실대며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는 아기의사들을 이끌고 승리의 깃발을 든 나폴레옹 같은 모습으로 병실을 빠져 나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아니, 의사들은 다 혀가 짧아? 왜 말을 뚝뚝 잘라 먹는 거야?”
“아까 시끄러웠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뭘 조용히 하라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 의사 귀가 시원찮은가 봐?”

“자기 환자를 보러 왔지만 다른 환자들도 딴 짓 하지 말고 모두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뜻이겠지 뭐. 우리가 자기 학생들 인줄 아나 봐.”
“정말 아프지 말아야 한다니까. 몸이 아파서 왔으니 더러워도 참아야지 별 수 있어? 뭐라고 항의라도 해 봐.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아프지 않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니까. 아픈 사람만 손해야. 내 돈 내고 구박에 천대까지 받으면서, 아무리 자기 멋대로 함부로 해도 의사에게 뭐라고 할 수가 있나?”

“그런데 의사들은 배울 만큼 배워서 가질 만큼 가졌고, 그래서 누릴 만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왜 다들 저 모양이야? 내가 수술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다 들었는데, 세상에 다른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지겨워. 이 환자는 또 몇 시간짜리야?’ 라고 하더라니까. 세상에. 마취되어 잘 못 알아듣는다고 그럴 수가 있어? 정말 사람도 아니야.”
“누가 사람도 아니라는 거야? 그렇게 말한 의사가? 아니면 누워있는 환자가?”
“몰라. 말도 하기 싫어. 사람이 아니라 처리할 물건처럼 보이나 보지 뭐. 가뜩이나 몸이 아프니 마음도 어두워지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할 거 아냐. 그냥 도와주나? 돈 받을 만큼 충분히 받고 살펴주는 거지. 제 때에 치료비를 못내 봐. 그래도 살펴주는지 어떻게 하는지 안 봐도 빤한지 않겠어?”

저마다 쏟아내는 쓰디쓴 불평으로 평화롭던 병실은 평화를 잃어가고 있었다. 병원 입구에 새겨진 ‘친절한 병원, 깨끗한 병원, 문턱 낮은 병원’으로서 환자 제일주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는 이 병원의 홍보용 문구가 그야말로 먹칠이 되고 있는 순간이다.

문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병원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병원의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주차장 앞에 이런 팻말이 있었다.

「교수차량 전용주차 일반차량 주차불가」

편치 않은 육신으로 고통과 싸우면서도 함께 하는 이들의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게 양보하는 사실상 이 병원의 주인들에게, 몸이 아파 힘없다는 것을 이유로 함부로 말하고 겁주며 시도 때도 없이 윽박지르고 주눅 들게 하여 평화를 깨트린 대가로 그들이 대학병원에서 얻어낸 특별대우는 저런 것일까? 내가 다녀 본 수많은 나라의 어떤 병원에서도, 아니 국내 병원 어디에서도 저런 팻말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미처 못 보았거나 잘못 보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빨리 빨리 차 세우고 가서 많이많이 환자들을 짓밟으라고 저런 대우를 해 주는 쓸데없이 사려 깊은 OO대학병원 관계자들과, 흐뭇한 마음으로 당연하게 저런 대접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꼭 도움 될 만한 훌륭한 사자성어(四字成語) 둘을 선물하고 싶다.

주차금지 : 술과 커피는 팔지 않습니다.
유비무환 : 비가 오는 날에는 환자도 없다.


(*이 글을 해당 병원장께 이메일로 보내었고, 열어보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행동한 의사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병원 자체 내에서 사과 공지를 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하겠는지를 물었지만 답은 없었고,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무슨 배짱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개무시를 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 글은 격월간 <공동선> 3,4월호에도 실려 있다.)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김정식 사/곡 「평화의 노래」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