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29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 14,1-15,47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에서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허무로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의 패배로,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의 기대가 절망으로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다 최고회의의 심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에 허락하는 자치 기구였습니다. 지방 유지인 원로들과, 대사제와 중견 사제들, 그리고 율사 대표들로 구성된, 전체 인원 71명의 의결 기관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그 최고 회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야기가 그분이 거짓 예언자로 단죄된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했는지 알아맞히라고 놀렸습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보내어, 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최고회의가 그분에게 내린 거짓 예언자라는 죄명은 총독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최고회의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둔갑시킵니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하였다고 고발합니다. 이 사실은 총독 관저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장면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그 앞에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칩니다. 식민지에서 왕으로 자처한 인물이 점령군 군사들로부터 받는 조롱입니다.

▲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 귀스타브 도레.(1832-1883)

예수님의 남다른 생각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다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이 죄인을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병고, 가난, 실패 등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인간이 상상해낸 무자비한 하느님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단죄하면, 하느님도 당연히 단죄하고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온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과연 죄인도 사랑하신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쳐 온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여 그들의 권위를 보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집단 혹은 비 종교 집단을 막론하고, 한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며 도전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합니다.

예수님이 제거된 경위

그 시대 유대 사회 실세들의 눈에 예수님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한 목수의 아들입니다. 종교적 신분은 평신도이며, 재산과 지위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공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크게 존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폭언까지 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과 더불어 누려 온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대사제 가야파의 말을 전합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 죽고 온 겨레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요한 11,50) 자기들이 만든 질서와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 대사제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그렇게 제거되셨습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적대시하던 로마 총독의 협조까지 얻었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로마제국을 거슬러 음모한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편법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멀리 있는 원수의 협조를 얻는 편법입니다. 미움은 그 대상을 제거하는 데에 온 힘을 쏟게 하고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진리에 관심이 없고, 식민지 유대를 무난히 통치하고자 하는 로마 고위 공무원입니다. 통치자인 그에게 식민지 청년 한 사람의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빌라도가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에게는 식민지인 유대아의 군중과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들의 권위주의와 옹졸함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그가 진리에는 관심 없고, 인간 생명을 소홀히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 옹졸함, 생명경시 등의 죄는 인류가 항상 범해 온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도 고백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대의를 위해 투신하면, 그 생존은 보장되지 못합니다. 그 대의가 신앙이면 순교, 그것이 국가라면 순국, 그것이 직장이라면 순직입니다. 자기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쳐 대의를 추구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자기 목숨보다 하느님의 일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발생시키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의 삶에서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살겠다고 열심히 비는 소인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대의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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