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이동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4주년을 맞아 발표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의 성명서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핵 문제에 대한 입장과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탈핵 운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아마도 당분간 계속 논란이 있을 듯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핵발전소 재가동과 관련하여 교회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판단과 해결’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기술에 대해 아주 순진하고도 피상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과학기술의 영역에서 전문가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과학기술,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기술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사회문화적이고 정치경제적인 요인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내적 논리로 이루어지는 초사회적 현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기술은 사회적 영향을 다양하게 받아 진화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한 사회의 가치와 윤리, 자본과 노동의 관계 등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사람은 한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마치도 진공관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없다. 이런 뜻에서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기업과 자본에 의해 조직되고 동원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 기업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각종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의 개념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과 자본주의를 벗어난 과학기술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정평위의 성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가에게 맡기자는 주장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주장이다. 즉, 과학기술은 사회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복잡성과 난해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라고 부르는데, 기술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공적 정책결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는 이것이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전문가 집단의 이해관계 또는 더 넓게는 과학기술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기업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이미지. 원자폭탄은 심화된 과학기술의 결과다.(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전문가가 아니어도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의 영역에서 전문가가 아님에도  우리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혀야 하고, 이런 문제를 전문가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과학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듯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고, 더 나가서 과학기술자들의 전문적 견해가 사실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과학기술의 공공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그 영향이 매우 포괄적이다. 예컨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특정한 과학기술은 그러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기술의 영역에서의 정책결정도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정부에서 추진하는 과학기술 연구와 정책은 그 재원을 시민들의 세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도 폭넓은 시민의 참여를 통한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 시작에서부터 귀족과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전체 시민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파벌을 통제하여 전체 시민의 정치적 결정을 존중하고자 했다.

과학기술은 민주주의 문제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정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기술관료주의, 그리고 시민들의 대중적 참여보다는 지적 능력과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책의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엘리트주의(meritocracy)가 사회 전반에 걸친 시민의 참여와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핵발전소의 재가동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문제이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그리고 ‘전문가에게 맡기자’는 주장은 그렇게 말하는 이의 의도와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고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우리 모두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린애와 같아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느새 넘어지고 다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관심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을 맡아 주신 이동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이동화 신부
(타라쿠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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