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22일(사순 제5주일 ) 요한 12, 20-33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청하고, 제자들은 그 말을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을 실제로 만났는지는 알려 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런 말씀들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육칠십 년이 지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신앙에 대한 일종의 명상록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리스 사람을 등장시킨 동기가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전혀 모르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비 유대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리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서가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인물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인물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으로 그분의 중요성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중요하고, 감동스런 것인지를 구약 성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죽음 후,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삶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삶의 특징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이 하셨던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자비로운 하느님을 꿋꿋하게 전하다

▲ 십자가를 진 예수, 엘 그레코.(1578)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두 그렇게 실패하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실패의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들이 가르치던 바와는 다른 하느님을 그분이 믿었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의 문자(文字)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는 하느님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을 보아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꽃도 돌보아주는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말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유대교는 믿었습니다. 물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였습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 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쳤습니다. 유대교가 가르치듯이,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종(루카 7,1-10)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이런 불행한 생명들을 당신 한 몸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웃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하다

인간은 자유를 지녔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족도, 직장 동료도, 모두 자기 한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기 가족 외의 다른 모든 인연을 외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이 아끼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고, 양극화를 비난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불렀습니다(요한 15,15). 제자들이 떠나가서 각자 자유로이 열매 맺을 것을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존경스런 호칭이나 복장으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그분과 같은 열매를 맺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처세하여 입신출세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주장하는 속물들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따라 맺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허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 받는 생명들을 특별히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그들도 행복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자기 주변의 버려진 이웃들을 백안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12,26)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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