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주교회의 정평위 유흥식 주교 성명서 유감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4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들이 소신과 양심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국민 전체가 신뢰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말은 교회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주교회의 정평위원장인 유흥식 주교는 이 성명서에서 “핵발전소 재가동과 관련한 심의 과정은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사안인 만큼 교회가 안정성 심의 과정이나 법률준수 여부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했다.

유흥식 주교는 논란 중에 있는 사안에 대해 “어느 한쪽의 주장만 큰 목소리로 강조하여 분열을 자극”하지 말고, 전문가들에게 해결책을 맡기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취해 왔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2013년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원천적으로 핵발전소를 반대한다. “핵발전이 인류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미래 세대에 재앙을 물려준다”는 이유로 생명권과 환경권을 침해하는 ‘새로운 사태’로 규정했다. 1891년 레오 13세 교종이 가톨릭사회교리의 효시가 된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해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했듯이, 이제는 주교회의에서 모든 인류를 파멸로 치닫게 할 재앙인 핵기술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 주교의 이번 성명서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들 10만여 명이 참여한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금지 입법 청원을 위한 서명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이 서명운동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원회에서 제안했던 것이어서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정평위 위원장 주교가 정평위 산하 환경소위의 서명운동에 반대하고 나선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월성 1호기 가동 연장 심사를 하던 15일 오전, 원안위 앞에서는 종교계, 시민사회계, 각 정당이 노후 원전 즉각 폐쇄를 촉구했다.ⓒ정현진 기자

유흥식 주교... 교회의 탈핵운동에 찬물

유흥식 주교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핵문제와 관련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므로 입장 표명을 할 자격이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교회의 일반적 정서에 어긋난다. 천주교 원주교구, 안동교구, 부산교구, 대구대교구를 중심으로 ‘동해안 탈핵 천주교연대’가 활동하고,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는 수년째 탈핵운동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과제로 삼아 왔다. 이 모든 노력이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치부된 것이다. 염려는 할 수 있으나, 행동하지 말라는 조언 또는 경고로 들린다.

유흥식 주교의 발언은 가장 먼저 4대강 공사에 반대하던 주교회의 성명서 발표 이후에 정진석 추기경이 한 말과 흡사하다. 2010년 당시 정 추기경은 주교회의의 뜻이 ‘4대강 공사 반대’가 아니었다며, 밤낮 하느님의 뜻만 헤아리는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정치, 경제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당시 정 추기경의 논리도 ‘전문적인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핵마피아’ 논란이 불거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집단이 전문가-관료집단이라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논의를 생략하고 ‘전문가’에 맡기라는 조언은 현실성이 없다.

실제로 유흥식 주교는 이번 성명서에서 자신 역시 핵 전문가가 아니면서, 한국교회의 입장은 핵발전소 폐쇄를 주장해 온 일본, 캐나다, 독일교회와 다르지 않지만, “월성 1호기의 경우, 시급성이나 문제의 본질이 다른 지역의 문제와 상이하므로 대처하는 자세도 다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가 아닌 유 주교가 어떤 연유로 외국과 한국의 핵 문제가 본질이 다르다고 판단하는가? 실상 이 성명서에서는 ‘시급성’이나 ‘문제의 본질’이 외국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를 시작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유신정권이 마치 ‘변형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기억난다.

탈핵 성명이 아닌 정치적 발언

이번에 발표된 유 주교의 성명서는 참혹한 후쿠시마 원전사고 4주년을 맞은 한국 천주교회의 탈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정치적 발언’처럼 들린다. 유 주교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몇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유흥식 주교는 2015년이 “우리 민족의 위기”라고 불안해 하며, 국가기관과 교회와 국민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위험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만들라고 강권한다. 그래야 “한강의 기적은 물거품이 되지 않고, 세계사에 남을 인류의 희망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문한다. 국가기관과 전문가집단, 활동가와 정치인들이 원칙과 양심을 지키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원칙적인’ 훈계에 몰두한다. 성 명서의 청취대상은 국민이 아니다. 국민은 별일 없지만, 일부 사람들이 “논쟁과 갈등으로 전국민을 불안과 불신으로” 몰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난데없는 ‘한강의 기적’이 왜 2015년에 다시 등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를 희생하고 이룬 유신정권의 경제성장 신화를 박근혜 정부 아래서 다시 입에 올리는 주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박근혜 정부는 정권초기부터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과 세월호참사에 대한 어설픈 대처로 국민들에게 정권에 대한 불신을 안겨주었다. 핵발전소와 관련한 온갖 비리들은 국민들에게 ‘원전사고’의 가능성이 높다는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심지어 지난 18일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가 “월성과 고리 원전 25킬로미터 반경 안에 있는 울산에서 노후 원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울산이 120만 거주 인구와 한국의 공업화, 산업화 기반 도시임을 감안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상의 리스크(위험)와 영향을 받을 것이 눈에 비친 울산의 현실”이라고 밝혔다. 전국민을 불안과 불신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능한 정부와 핵마피아가 암약하는 전문가-관료집단이다.

실제로 유 주교는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의 이번 성명서에서 ‘불신’과 ‘불안’이라는 표현을 6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흥식 주교의 관심사는 ‘핵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 주교에게는 월성 1호기 재가동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그래서 전 국민이 불안과 불신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안과 불신을 일으키는 국가기관, 탈핵활동가, 정치인들만 정신 차리면 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탈핵문제와 관련해 유흥식 주교는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과 국내의 산적한 문제로 인해 불안과 불만이 쌓여있는 시점에서 자극적이고 불합리한 불안 증진은 국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유 주교의 입장은 마치 견해 차이가 있는 두 집단의 싸움을 말리면서, 공명정대하고 과학적이라고 ‘믿는’ 핵발전 전문가에게 사안을 넘겨버리자는 것이다. 가장 공정한 판단 같지만 가장 비현실적인 ‘도피’의 변(辨)이다. 나라살림이 복잡하니 탈핵 논란은 그만 접자는 것인데, 이런 논리라면 세월호참사 역시 나라사정이 좋지 않으니 우는 소리 그만하자는 얘기가 나올 법 하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면 남침 위협과 ‘북풍’(北風)을 빌미로 국민총화와 일치단결을 외치던 독재정권 시절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하나마나한 성명서...무엇이 적절치 못한 행동인가

▲ 한국 천주교주교회의가 펴낸 "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지금여기 자료사진
도대체 이런 성명서를 왜 후쿠시마 4주년에 맞춰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정부와 환경단체와 정치인들에게 하나마나 한 원칙적인 권고를 하고, 결국 만사를 전문가에게 맡기라는 이야기라면, 교회가 그동안 선언해 온 ‘탈핵’운동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밀양 송전탑을 저지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할머니들과, 경찰과 용역에게 들려 나가던 여성 수도자들의 노고를 무색하게 만드는 성명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묻고 싶다. 노란 풍선을 들고 ‘탈핵’과 ‘원전유치 반대’를 외치던 사제들은 그저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하는, 한국사회에 불신과 불안을 조성하는 세력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불안하다. 탈핵운동을 하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들에게 교회 권위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유흥식 주교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자신들이 펴낸 “핵과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읽어 보기를 정중히 청한다.

“핵기술은 현재의 인류와 자연과 공동체와 그 구성원, 그리고 미래의 지구와 미래 세대에, 모든 분야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드시 소속 공동체 시민의 책임 있는 공동 참여가 실현되어야 할 분야다.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정부 주도의 계획과 준비, 실행과 사후 관리가 은밀하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핵발전과 핵무기 관련 분야에 시민들의 책임 있는 참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38항)

“핵발전과 관련해 책임 있는 참여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사회적 문화적 장애’는 정부 기관이나 언론을 통한 일방적 홍보와 객관적 정보의 차단과 왜곡이다. 핵발전 산업은 모든 시민의 삶에 영향을 주면서도 시민의 책임 있는 민주적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139항)

전문가 집단이라는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교회의 이러한 판단을 입증해 주고 싶었는지, 교회와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27일 한수원의 월성 1호기 재가동을 허가했다. ‘공동선’을 위해서 무엇이 적절치 못한 행동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참에 4월 16일 세월호참사 1주기에 즈음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어떤 성명서가 발표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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