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4화 (열세 살 때, 1952)

 

봉화에 온 후로는, 형과 같이 산에 나무하러 다니거나, 부역을 다니기도 했지. 그리고 할머니가 손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당시 정부에서 금하는 밀주(막걸리)를 조금 담그어 한 두 대폿집에 팔기도 했는데, 주로 여동생과 내가 술 배달을 했어. 남모르게 감쪽같이 배달해야만 했지. 들키는 날이면, 거액의 벌금을 내거나 옥살이를 해야 하니까.

당시에는 부역도 자주 있었어. 물론 노임도 점심도 주지 않고 말이야. 산이나 냇가의 사태막이 공사나 비포장도로에 자갈을 까는 공사였지. 요즘처럼 무슨 굴착기나 짐차 따위가 있었겠어? 각자 집에서 가져 온 괭이니 호미니 삽이니 바지게로 힘들게 일했지. 당시 대부분의 도로-신작로는 비포장이었고 산은 민둥산이었으니까, 큰 비만 오면 산이나 제방이나 도로가 무너지거나 파손되는 것을 막거나 보수하기 위해서였어. 한 가정에 한 사람씩은 반드시 부역에 나가야 했지. 점심도 못 먹고 하루종일 맹물만 마시며 할당된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던 일이 기억나는군. 부역하던 분들 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셨어.

겨울철에는 형과 함께 먼 산까지 나무하러 다녔지. 그 때는 연탄이 나오기 훨씬 전이어서, 시골에서는 어느 집이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니까, 가까운 산에는 할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었어. 형은 나보다 몇 달 앞 선 경험자라서, 나에게 나무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자상하게 가르쳐주었지. 소나무 낙엽인 갈비(솔가지)를 갈퀴로 긁어모아, 지게에 차곡차곡 켜켜이 재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어. 형의 갈비짐도 어느 정도 그럴 듯 했지만, 어른들의 갈비짐은, 어른 한 키 반 정도로 높기도 했지만 무척 아름다웠지.

나는 형의 지도를 받아가며 실패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낼 수 있었어. 또 소나무 아래서 혹은 올라가서 소나무 쫄가리(어른 손가락 굵기의 죽은 솔가지)를 꺾어 모아 지게에 지고 오기도 했지. 여자들은 지게도 없이, 내가 진 것보다 훨씬 큰 쫄가리 둥치를 머리에 이고 가기도 했어. 그리고 산판(산의 나무를 모조리 베는 일)을 마친 산에 가서는, 베고 남은 밑둥치인 께두기(그루터기)를 도끼로 찍어, 넓적넓적한 장작거리를 하기로 했는데, 께두기를 도끼로 찍으면 쩍쩍 갈라지면서, 온 산이 쩌렁쩌렁 울렸지. 께두기는 거의가 생나무라 얼어 있어서 잘 갈라지기는 했지만, 작은 것이라도 무척 무거웠지.

처음 께두기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인데, 나는, 갈라놓은 께두기가 아깝고, 또 집까지는 너무 멀어 한번 오가기만 해도 반나절이 더 걸리기에, 되도록 많이 지고 가려고 했어. 나는 내 지게에 하나 둘......열 쪽을 올리니까, 형이 웃으면서 말렸어.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또 지게질이 서투르고 하니, 다섯 쪽만 지고 가라고 충고했어. 그런데 나는 우겨서 여덟 쪽을 지고, 간신히 일어나 뒤뚱거리며 산을 내려가다가, 산비탈 길에서 그만 지게가 옆으로 쏠리고 말았지.

지게에 묶여있던 께두기는 산비탈 여기저기로 굴러 흩어지고 나는 빈 지게만 지고 있었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구. 만일 내가 께두기와 지게랑 함께 굴렀다면, 큰 사고를 당했겠지. 내 허리도 멀쩡했어. 뒤에 따라오던 형이 ‘욕심을 내더니......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하면서, 산비탈 여기저기에 흩어진 께두기를 모아, 여섯 쪽을 다시 내 지게에 올려 지겟줄을 매어줬어. 여덟 쪽 중 두 쪽은 산길 가에 뒀다가 나중 기회가 있을 때 가져가기로 했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힘에 넘치게 욕심을 부리면 화를 부르게 마련이야.

지금은 할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으시니까, 이제는 지게도사가 되셨겠네요? 

어림없는 일이야. 더구나 요즘 농사는 지게질을 드물게 하니까 더욱 그렇지. 평생 지게질을 하신 분을 보면, 사람과 지게가 하나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구!

어느 해 겨울, 형과 함께 예천에 사시던 외삼촌댁을 다녀온 적이 있었어. 차비도 뭘 사 먹을 돈도 한푼 없이, 봉화에서 영주를 거쳐 예천까지 백여 리 길을 걸었지. 15세, 13세 소년 형제가. 가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형과 나는 길가에 남아 있던 눈더미를 헤쳐 눈을 파먹으면서 힘겹게 힘겹게 갔어. 그러나 당시 짐차 운전을 하시던 외삼촌댁의 환대로, 며칠 동안 잘 먹고 잘 놀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나는군. 지금도 길가에 쌓인 눈더미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나.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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