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나는 심지가 굳지 못해서 아직도 담배를 태우고 있다. 몇 번이고 금연을 시도해 보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담배를 피우고 나면 늘 손과 입을 헹구곤 한다. 나도 담배를 피우지만 남의 담배 냄새가 역겹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도 내 입가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로 인상을 찌푸릴까봐 조심스럽다. 그렇게 조심하다보니, 이젠 습관이 되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정갈하게 옷매무새를 여며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도 그 즈음이다.

쉰 살이 넘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흰 머리카락 때문에 밥을 먹을 때도 나잇값을 하지 않으려고 연신 휴지로 입꼬리를 닦아 낸다. 추접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 자랑할 일도 못 된다. 그래서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에게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전철 안에서 젊은이들과 다투는 어르신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노인의 악덕은 완고함이다. 고집스럽게 제 생각만 내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노인들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한국사회 자체가 고령화 사회로 가니, 한국교회도 고령화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면 할 말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없어도 정말 없다. 교회가 얼마나 답답하게 여겨졌으면 그럴까?

어려서야 얼떨결에 세례와 견진성사까지 받아 두었지만, 머리가 여물고 나서는 교회에게 가르치는 ‘교리’가 영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정성으로 하지 않던 ‘신학’을 그 나이에 공부할까.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검색어만 두들기면 궁금한 소식과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데, 교회 언어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알 수 없다. ‘노인들의 나라’에선 이렇게 말한다. “그냥 믿어!” 그러면 젊은이들은 말한다 “믿어져야 믿지요.”

그리스도인, ‘가난한 예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

▲ 키르케고르.(1813-1855)
여기서 ‘노인들의 교회’란 생기가 없는 교회다. 제대로 된 질문도 충분한 답변도 없는 공동체다. 그저 ‘만사가 그런대로 잘 굴러간다’고 편안하게 여기는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 클럽이다.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만약 나자렛 사람 예수가 주변부 인생들을 데리고, 구차하게 연명하고, 상처받고 자지러진 사람들과 더불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다시 나타난다면 어떤 광경이 벌어질지 상상했다.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를 유다인들처럼 처형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예수를 멸시하고 질책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분을 거부하고 험담하고 경멸하고 조롱했을 것이라 했다. 예수와 그 동료들의 행색이 남루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다시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회당국은 교도권의 승인 없이 떠드는 예수의 입을 틀어막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 되면, 실상 바리사이와 다름없는 성직자들과 철학자, 정치가들과 점잖은 시민들은 예수를 보고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키르케고르는 전했다. “한 인간이 이 지경이라니.... 무겁고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잃어버릴 만한 것이라곤 조금도 지니지 않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질겁하고 도망 가 버릴 게야. 나에게 오라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모두 쉬게 하겠다고! 그 지경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말인가. 이것은 마치 거지가 도둑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단 한번도 ‘복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키르케고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가난한 예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그분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그분의 뒤를 따랐던 어부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더불어 그분을 닮아 사는 가운데 가난한 이들의 ‘형제’요 ‘자매’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 결과가 세상이 주는 십자가라도 기쁘게 받겠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어려운 길이고, 엄청난 도전이고, 좁은 길이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 안전한 내 가족 울타리와 본당 울타리에서 누리던 평화를 깨야 하는 게 또한 그리스도인이다.

부유한 노신사의 교회가 누리는 평화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거리에서 상처받고 멍들고 더러워진 교회를 나는 더 원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 평화로운 사람은 진짜 평화를 아는 사람이다. 아늑한 카페에 앉아 커피향을 즐기면서 얻는 평화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평화다. 그러나 영적인 전쟁터에서도 고요한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잠겨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다. “인생, 뭐 있어?”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신앙생활을 하거나, 세상만사를 다 달관한 듯이 뒷짐 지고 있는 게 ‘노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속속들이 다 알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청춘’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당은 불이 꺼져 있다. ‘오베르 성당’이라는 작품에서는 성당 바깥이 그리도 환하고 역동적인데 성당만이 어두컴컴하다. ‘별이 빛나는 밤’이란 작품에서도 교회당 불은 꺼져 있다. 그 밤을 밝히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별빛뿐이다. 고흐의 그림에선 밤이고 낮이고 모든 사물이 무한한 생명력으로 솟구치고 있다. 다만 교회만이 생기를 잃었다.

고흐가 당시에 경험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철저하게 배제된 ‘부유한 노신사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고흐는 어떤 귀족들의 얼굴도 초상화로 그려주지 않았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자기 자신이거나, 자기처럼 남루한 사람들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광부가 되었든, 감자 먹는 농부가 되었든, 뜨개질 하는 여인이든, 우체부이든, 심지어 매춘부조차 모두가 성자(聖者)처럼 그려졌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198항)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호소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4년 8월 방한 첫날 한국교회 주교단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면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사실상 ‘가난’이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복음을 위해 가난해질 용기가 필요하고, 한 많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도전이 되고, 교회가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복음을 향한 이러한 열정이 우리 교회에 청춘을 되돌려 줄 것이라 믿는다. 생생한 믿음을 다시 얻게 할 것이다.

*대구대교구 소공동체 소식지 <옹기종기>에 실렸던 글을 다듬어서 다시 싣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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