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철 저, "천개의 바람", 피플파워, 2015

봄이었다. 참 아름다웠다.


꽃으로 시작되는 소풍이 얼마나 아름다우랴
적막으로 시작하는 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첫 날갯짓으로 창공을 수놓는 것
그래 우리네 소풍은 봄 飛로구나

- '봄 飛' 전문


그런데 꿈이었나 보다. 닥쳐올 바람의 일을 아무것도 몰랐기에 꿀 수 있었던 꿈.

뜨거운 너, 돌아오지 않는 너

1.

바람은 무엇으로 자신이 왔다갔음을 전할까.
바람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
그 어떤 것으로 바람이 왔던 순간을 잡아챌 수 있으며 그 어떤 말이 바람을 받아 안을 수 있는 것일까.
사라져버린 내 사랑, 이제 바람만이 알아줄 것인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하는 이를 가장 사랑하는 순간에 잃어버리고 우리는 바람 속에서 울었다. 하도 서러워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바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불었다.


그 바람마다
소리가 있기를

그 바람마다
춤이 있기를

그 바람마다
진정, 바람이 있기를

천개의 바람마다


- "천개의 바람" 전문

김유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천개의 바람" 속에는 우리가 차마 받아들여야 했던 그러나 기어이 보내지 못한 지난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들어 있다. “엎드려 듣는 빗소리는 너였다”는 바닥 밑에서의 깨달음마저도 사치 같았던 시간들이었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묻고 또 묻고 싶었던 한 마디.

오늘이 지나면
오늘이 지나면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시나요

- ‘떨어져서 핀 꽃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 전문

2.

철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는 나의 죽음이 아니다. 너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너의 죽음을 살아생전 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너보다 오래 살아 남아 너를 고이 떠나 보내 줄 수 있어야 사랑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다. 사랑의 잔혹한 맨얼굴이다. 맹골수도에서 우리가 맞이한 참혹한 사랑의 현재다.

동백은 붉어져 떨어지고

나는 희어져 휘어진다

겨울은 간 것인가

봄이 온 것인가

동백은 떨어져 붉어지고

나는 휘어져 희어진다

오늘 봄비가 내렸다

- '동백과 나' 전문


▲김유철, "천개의 바람", 피플파워, 2015
이토록 온 산하에 울리는 너의 부재. 하늘과 땅과 바람이 우리에게 묻고 또 물었다. “네 아이는 어디 있느냐?”

처음엔 입술이 붙어버려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엔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할 수 없었다. 굳어 들어가는 몸으로 손짓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저 바다에 있습니다. 아닙니다. 처음엔 바다에 있었는데.... 이젠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모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아이들을 데려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쳐 주셔야 고이 묻어라도 주지 않겠습니까.

만일, 만일, 만일 어떤 사람이 동시에 어느 한 곳과 다른 한 곳에 있을 수 있었다면, 그때 어느 누가 팽목항으로 달려가기를 마다했으랴. 아이들의 손이 아직 그 바다에 부표로나마 떠 있었을 그 천금 같은 시간 동안 어찌 그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으랴!

어떤 강물이 있었다 산속에서 시작하여 산골짜기를 지나고 산자락을 돌아 들녘으로 나왔다 세상의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사막을 만났다 사막너머에는 강물의 종착지인 바다가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 바다에 이를지 강물은 몰랐다 강물은 생각에 잠겼다

네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에 네 몸을 맡겨라
바람은 사막 저편에서 너를 비로 뿌려 줄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겠지

닿을 수 없는
품을 수 없는
만져지지 않는
온전한 강물로서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겠지

- '강물에게' 전문

우리는 오직 한 순간에 한 자리 밖에 있을 수 없는 ‘몸’에 갇혔고, 육하원칙에 갇혔다. 우리는 그 바다 앞에서 망부석이 되어가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달았다. 육하원칙은 우리를 희롱하고 조롱하며, 동시에 여기에도 저기에도 존재할 수 있는 ‘높은 분’들을 위해서만 꿰어 맞춰졌다. 시간도 공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한번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닫혀 갔고, 지극히 사랑한 죄로 이 견딜 수 없는 고통만이 ‘나’의 몫이었다. 숨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고통은 잠시도 떠나 주지 않는 것이었고 너를 앗긴 나는 산송장이었다. 아니다. 송장에게는 통증이 없는 궁극의 고요라도 주어질지니 나는 이제 감히 송장이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는 것인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六何 앞에서 나는 묵비권이다

사랑은 六何 너머에 있다

사람도 분명 六何 너머에 있다

-'六何 너머' 전문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그 명백한 ‘세대의 공백’을 감히 감당할 자 누구인가. 저주 받은 두 눈은 그 수평선에 못 박혔다. 떨어지지 않을 발길은 그대로 뿌리를 내렸다. 할 수 있었던 말은 ‘만약에’ 뿐이었다. 만약에 내가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너를 구할 수 있었던, 너를 끝내 붙들 수 있었던 어떤 순간이란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그랬을까.

3.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칼이 되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배달되지 않은 편지”만이 쌓여갔다. 세월은 이대로 영영 흐르지 않을 것이었다.

봄부터 한여름까지 푸른 잎 한가득
펼쳐놓았던 편지가 있었다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보고싶다고

배달되지 않은 편지가 고개를 푹 떨구고 가을을 맞는다
고개를 푹 떨구고

-'배달되지 않은 편지' 전문

그런 너는 이제 없다. 누가 데려갔는가? 나의 너를, 뜨거운 너를.

김유철 시인은 시 속에서 소풍을 간다. 아이들이 마지막 소풍을 가던 날처럼,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을 몰랐던 그 때처럼, 아직은 함께였다는 꿈이나마 붙들고 늘어진다.


그 날도 소풍이었어
소풍 안에서 또 소풍을 간 날이었지
무얼 먹은들 대수이겠는가
무얼 본들 그것도 대수였겠는가
그것이 하루였거나 반나절이었거나
찔레꽃이 흐드러졌거나 개구리가 마구 울었거나
돌사자 마주서듯 함께

-'소풍' 전문

 

그러다 부활절이 온다. 환장하게 아름다운 이 천지에 없는 것은 너뿐이다.

햇살은 까마득히 먼 곳 먼 시간에서 태어나
이슬처럼 방울지어 숲으로 떨어졌다
예수는 부활하지만
햇살은 부활하지 못한다

- '햇살은 부활하지 못한다' 중에서

시인은 결심한다. 이 生 다하도록 뜨겁게 들려주고 싶던 사랑의 말들은 이제 갈 데가 없다.
“모두 바람이 하는 일이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울고 또 울며 마음을 무디게 하는 일만을 생각한다. 그래야 그나마 “오지 않을 것 같던 저녁이 그 강으로 들어선다”(정중동 '靜中動'). 하루는 다만 그렇게 오고 간다. 시를 쓰는 일은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이고, “짜고 비린 맛”('파도는 파도를 일으켰다')만이 그나마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맛이었다. 그 맛은 눈물의 맛 그리고 태초의 바다 맛이다. 우리가 살아서 견뎌야 하는 맛이다. 쓰다. 너무 쓰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흙길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견뎠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시를 쓰는 동안' 전문

‘착하게’는 이제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번 생이 기쁨만은, 눈물만은 아니었다고”('체감온도') 말할 수 있기까지도 반평생이 걸렸는데.... 이마저도 빈말이 되려는 것인가.

“무의미”와 싸우며 시인은 “기적”을 꿈꾸기도 하고 “노루꼬리만큼 자라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수시로 무릎이 꺾인다. 바란 만큼 혹독하게 아파야 한다. 쓰러진 것인지 엎드려 기도하는 것인지 모를 결박당한 날들이 하염없이 고여 있었다. 좀처럼 흐르지도 않았다. 무감각해지기를 새로 배워 익혀야 할 날들만이 남겨진 자의 숙제인가.

지금부터 하는 일들은 처음해 보는 일이다
꽃을 봐도 꽃잎을 만지거나 향기를 맡는 일
음악이 들려도 볼륨을 높이거나 제목을 적어놓는 일
책이나 영화를 만나도 머릿속에 기억하는 일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 거다

아침 햇살 속에
해질녘 어스름에
저녁 달빛에
막연히 술 취한 어둠속에서도
먼 산이나 먼 바람이나 먼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거다

- '처음' 중에서

4.

시인은 그만 자신을 늙히우고 싶어 한다.
사시사철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살아 온, 계절의 변화에 황홀해하던 날들은 영영 가버렸다. 더 이상 시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은 살아생전 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말은, 이번 시집이 마치 풍장에라도 들어가기 직전의 어떤 각오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마감당했다. 남겨진 자가 할 일은 어쩌면 더 긴 기다림을 준비하는 것, 네가 오지 않을 나의 장례를 스스로 준비하는 일. 그 준비로 남은 생을 견뎌보려는 필사의 각오다. “장인을 묻고 돌아와” 가눌 수 없는 마음이었을 때도,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그대를 만나 행복”했다고, “연잎 닮은 당신에게” 나직이 고백하면서 휘적휘적 준비한다. “하늘이 나를 부르시면” 할 말을 준비한다.

‘나’는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다의 것이었다. 바람의 것이었다. 아니 시간의 것이었다. 건질 수도 없는 무의 것이었다. 형체를 가졌다고 믿었던 죄로, 천 갈래의 가슴 찢어짐을 받아 안아야 했다. 한때나마 형체를 가졌었던 그래서 움직임과 머묾의 순간들을 지나왔던 자가 감당해야 할 업보였다. 십자가였다. 형상 속에서 만났던 존재들과 생살 뜯는 이별을 당했는데도 나의 피만 흥건하고 너의 흔적은 온데간데없다. 이 슬픔을 기도로 바꾸려는 몸부림이 시인의 마지막 기도는 아닐까. 그럼에도 보고 싶다. 네가 너무 보고 싶다. 갈수록 더 보고 싶다.

천 년도 찰나, 찰나도 천 년, 천 개의 바람은 곧 하나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그날처럼.
하여 우리는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이 바람이 되어. 다시 소생하는 봄이 되어. 봄 飛가 되어.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