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15일(사순 제4주일 ) 요한 3,14-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니코데모와 대화하면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인물이며, 유대 최고회의 의원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저명 인사였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가 유대의 지도급 인사로서는 드물게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그 대화의 내용은 속기록이나 녹취록을 옮겨 적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십 년이 흐른 다음, 요한 복음서를 집필한 신앙공동체가 제자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를 상기하면서, 그들이 믿던 바를 그들 방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인 양 알리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내용입니다.

▲ 구리 뱀, 귀스타브 도레.(1832-1883)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 공동체는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하였습니다. 구리 뱀 이야기는 구약성서 민수기(21,4-9)가 전해주는 고사(故事)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고, 물린 사람들은 죽어 갔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복음서는 그 고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 광야의 구리뱀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할 때, 구원에 이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면,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진리를 읽어 내어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십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4-5). 같은 말이 오늘의 복음에도 반복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보여 준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그 빛 안에서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실천하며 가르친,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둠 안에 있으면,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 안에 삽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어떤 혜택, 즉 요사이 말로 ‘대박’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믿어서 얻어 내는 보상도 아니고, 인간의 신심(信心)행위에 대한 포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보여 주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비굴한 순종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일신(一身)의 영달을 위해 하느님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재물이나 지위 하나를 얻어, 뽐내며 살기 위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사랑합니다. 복음서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하느님 자녀의 당당한 몸짓입니다.

흔히 신앙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하는 교리를 믿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모순된 말을 믿고,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지킬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금육(禁肉)과 금식(禁食)을 비롯해서 주일 미사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 등 교회가 만든 법규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을 강구하고. 전대사와 한대사를 얻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며,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세들은 신앙의 빛을 잃고,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게 하는 어둠입니다. 신앙은 합리적 사고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합리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율사들을 비난하였습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카 11,52)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빛으로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 예수는 우리가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어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법규들도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몽매하던 유럽 중세에 만들어져,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제도와 관행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는 복장과 존칭들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적 어둠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감춰 버리는 어둠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둠 안에는 인간의 허세와 비굴함은 보여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과 예수님이 실천하신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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