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6]

 

유대교는 인류의 보편적 종교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통해 전승되어 온 유대인의 종교이다. 과거에 비하면 율법적 의무가 약해지고 그 해석 방식도 다양해졌지만, 율법 중심의 종교적 분위기, 특히 안식일법을 지키려는 분위기는 현대 유대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 덕에 오늘날의 이스라엘에서도 주말이 되면 호텔 장사가 잘 된다고 한다. 단순히 주말을 즐기는 인파 때문이라기보다는, 호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안식일에 요리나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오랜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어느 정도 문화적 차원인데다가 형태도 다소 바뀌기는 했지만, 수천년전 안식일 규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천년전 이런 규정은 그저 문화가 아니라 '법'이었다. 그것도 신정체제에 근거한 법이었기에, 그 법을 시키는 것은 신께 이르는 길이기도 했다. 인간의 행위로 이른바 구원에 이른다는 사고 방식을 잘 담고 있는 셈이다. 과거의 유대교는 지금에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율법 중심체제로 뒷받침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활동했지만, 예수라는 분의 가르침은 반대에 가까웠다. 예수는 짧은 생애 동안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니 하느님은 죄인을 도리어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인간이 노력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미 구원하셨으니 그에 대한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식 사고방식이었다.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애당초 사회적 한계 안에 상당 부분 갇혀있는 것일 수 밖에 없는 마당에, 그런 행위, 그것도 일반 무지렁이들로서는 다 알기도 지키기도 힘든 율법적 행위를 구원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유대교적 율법과 상관없는 지역에 주로 머물면서 인간적 노력으로서의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구원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적절히 해석하고 보여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바울로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울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1코린 9,19-22) 

예수가 율법을 넘어 자유로웠듯이, 바울로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매어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을 대할 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왜인가? 그들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율법에 매어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에 매인 사람처럼 행동했다. 왜 그랬을까? 율법에 매어 사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 또 율법이 없는 사람을 대할 때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역시 그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믿음이 약한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자신이 약한 사람이 되었다. 역시 그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에 맞게 행동하고, 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되었다. 진리를 전하기 위해 다양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양한 형편에 맞게 행동할 줄 하는 이것이 유대인의 법을 넘어선 ‘하느님의 법’(21)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초월적인 하느님과 하나되고자 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을 저 구름 너머에 계신 어떤 특정 형상처럼 상상하고서, 하느님을 특정 집단이나 사람과만 관계맺는 존재인양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바울로처럼 행동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정말 율법을 넘어선 자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기는 커녕 저주하려들지 모를 일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자기의 생각 안에 가두어 두고, 자기만 맞고 남은 틀리다고 거부부터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율법 안 지키는 사람들을 정죄했을 것이고, 만일 율법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율법에 매인 사람을 비난했을 것이며,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약한 사람을 깔봤을 테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랫 사람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면서도 율법에 매인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도 스스로 모든 사람이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하나되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었고, 스스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을 만큼 겸손하면서도 용기있는, 그러나 자유로운 삷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립 4,11-12) 참으로 자신 있고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바울로처럼 살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바울로의 이러한 사고 방식과 실천을 근간으로 세계 보편 종교로서의 기초를 쌓을 수 있었으나, 이미 신앙과 맞바꿀 정도로 제도화한 교회 안에서 정말 바울로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율법을 모르는 이 앞에서 율법을 모르는 이처럼 자유롭게 행동한다면, 교회는, 수도원은 그 이를 정말 ‘율법’을 모르는 이라며, 신앙에 문제가 있다며 교인 자격을 박탈하려 들지나 않을까. 비슷한 경험을 해본 나로서는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씁쓸해진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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