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8일(사순 제3주일 ) 요한 2, 13-25.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성전 뜰에는 제물로 바쳐야 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고, 외국에 사는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가져온 외화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물들을 내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 버리고,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성전을 관리하는 사제들과 결탁한 사람들입니다. 사제들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고 상인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상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런 행패를 하시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전 상인들의 수는 많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합세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상인들이 예수님에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요즘의 조직폭력배와 같이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신약성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전정화 사건의 진실

▲ 예수의 성전 정화, 베르나르도 벨로토.(1773)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복음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기원에 어떤 사실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이 당신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을 환영하는 군중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 소요가 성전에까지 가서 어떤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사건 뒤 사제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은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 둘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일을 요한 복음서가 그분 공생활의 초기에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성전에서 일어난 소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기도의 집’과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이사 56,7; 예레 7,11)이 이미 쓴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예수님이 정화하여 그것의 본 의미를 살렸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시초에 옮겨다 놓으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일생 동안 하신 일이 성전의 의미,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의미를 새롭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높아지니 인간의 우월감도 높아지더라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한 분이신 야훼, 하나인 이스라엘, 하나인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인 성전이라는 뜻으로 타지방에는 회당만 두고,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두었습니다. 그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로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성전에 봉사하는 사제들의 권위와 우월감도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는 희석되고, 성전은 사제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나타내고, 그들의 잇속을 챙겨주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를 높이고 잇속을 챙깁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잇속을 챙기는 곳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의미를 왜곡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그들 자신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주제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아야 하는 기득권자들의 권위 안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며, 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에서 사제들이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수입을 올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가미된 표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행세하는 곳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사람들의 헌신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단어는 그분이 부활하신 뒤 신앙인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계시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거행하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성사 안에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실천방법, 스스로 내어 주고 쏟는 삶

예수님은 유대교의 신앙을 쇄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실패를 겪었지만, 신앙인들이 행하는 성찬과 그들의 삶 안에 그 쇄신은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성전 혹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권위를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성찬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롭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재물은 많이 가지고, 입신출세(立身出世)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불행을 예사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은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그런 우리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도우면서 헌신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하느님의 방식에 충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발족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방식을 배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성찬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 곧 ‘내어 주고 쏟는’ 실천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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