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핵발전소가 있는 경남 고리에서 시작된 “탈핵희망 국토도보순례”,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하지만 탈핵의 그날까지 탈핵희망 순례는 멈출 수 없습니다. 2014년 6월, 고리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내륙의 경부선을 따라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왜관, 구미, 김천, 추풍령, 노근리, 영동, 옥천, 대전, 유성까지 24일간의 순례, 지난 2월 1일부터 유성에서 세종, 조치원, 천안, 평택, 오산, 수원, 분당, 그리고 서울 송파, 흑석동을 거쳐 이곳 광화문 광장까지 총 17일간 순례가 이어졌습니다.

총 137일, 2256킬로미터의 순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 땅의 탈핵 실현, 그것이 중요합니다. 탈핵의 그날까지, 우리의 탈핵 희망이 시들지 않게 하는 것, 계속 키워 나가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월성 1호기 연장 가동 결정으로 탈핵을 바랐던 많은 분들이 분노했고 실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탈핵의 시기, 그만큼 더디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탈핵희망 순례단은 실망도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의 탈핵 희망은 더욱 깊어지고, 탈핵희망 순례는 더 큰 물결을 이룰 것입니다.

순례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가 마음에 품고 순례에 나선 물음은 핵 없는 세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탈핵이 이루어진 사회, 핵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볼까? 그 변화는 단지 핵발전의 정지, 핵에너지의 중단에 국한될까? 탈핵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 어떤 변화를 뜻할까?” 한번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핵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예수의 눈부신 변모의 이야기에서 핵 없는 세상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전조로 해석되는 예수의 변모는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그러니까, 이 변화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변화입니다. 그러니 그 변화는 현재의 세상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이 같은 변화를 배경으로, 핵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물론, 핵 없는 세상은 핵발전소의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가시적인 핵 없는 세상으로의 변화는 그 자체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핵 없는 세상은 핵발전의 욕구보다 탈핵희망의 물결이 더 커짐으로써 이루어질 것이고, 이 변화는 우리의 가치관, 삶의 양식이 바뀔 때에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질적 변화 없이, 우리가 희망하는 탈핵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근원적으로, 핵 없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그런 세상일 것입니다. 이 같은 질적 변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 좋은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내포합니다.

핵분열로 200여 종의 방사능 물질이 생겨납니다. 모두 자연에 없던 물질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창조질서를 훼손했음을 뜻합니다. 현대 과학의 힘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인간과 하느님과 관계가 결정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세상은 핵발전이 가져다 준다고 믿는 풍요로움을 하느님으로 섬깁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훼손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평화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망가집니다.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창세 3,17 참조) 선악과를 건드린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결과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1979년 스리마일 섬,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가 선악과로 초래한 죽음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핵발전을 통한 창조질서의 훼손의 뿌리에 탐욕과 오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탈핵, 핵 없는 세상은 훼손된 창조질서의 회복을 뜻합니다. 찢겨진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아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탐욕을 극복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나 혼자’보다는 “나와 너”, “우리 함께”를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좋은 삶, 참된 풍요의 삶은 독점적 소유가 아니라 함께 나눔에서 온다는 깨달음이 뿌리를 내렸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니, 핵 없는 세상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갔음을 뜻합니다.

이 같은 세상의 질적인 변화는 거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변화는 예수 부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라는 사건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수난과 죽음은 예수의 삶의 불가피한 귀결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적인 변화는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떤 종류의 결단인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분은 단순하고 소박하고 검약한 삶을 살았습니다. 단순, 소박, 검약의 삶은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사랑은 타인을 위해 자기를, 자기 것을 내어 주는 것, 내 자리를 좁혀 타인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내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려는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순례 중, 음식과 잠자리를 포함해 우리가 입은 많은 호의와 관심, 모두 이 같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는 생명을 포기할지언정 사랑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부활이란 변화는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핵 없는 세상이란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단순, 소박, 검약한 삶은 흔하지도 않고, 인기도 없습니다. 저마다 물질적인 풍요를 경쟁적으로,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에 몰두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경쟁적, 배타적인 물질적 풍요의 추구를 포기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탈핵, 핵 없는 세상은 우리가 소유와 탐욕의 삶을 포기하고 검약과 절제의 삶을 택하도록 요청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무분별한 소유와 탐욕의 삶,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검약과 절제의 삶, 평화가 깃들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탈핵, 핵 없는 세상은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핵발전소라는 분열과 죽음의 길인가? 탈핵, 핵 없는 세상이라는 생명과 평화의 길인가?

오늘, 삼일절입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외친, 뜻 깊은 날! 독립 또한, 물리적 독립만으로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전한 독립은 이전의 상태를 극복하는, 질적인 변화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핵에너지로부터 온전한 독립, 결별을 선언하면서, 핵 없는 세상, 탈핵으로 의지와 희망을 다시 한번 다짐했으면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예수의 말을 듣는 것,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의 방식으로 베풀어주시는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탈핵의 그날까지 탈핵 희망을 키워 나갔으면 합니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