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3월 1일(사순 제2주일 ) 마르 9, 2-1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분의 모습이 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고 살겠다고 제안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제안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어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변명도 해 줍니다.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실(史實)만을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문서입니다.

오늘의 복음이 언급하는 높은 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 옷이 빛나고 흰 것,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등은 구약성경이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이미 사용한 표상(表象)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그런 표현들을 가져와 이야기를 꾸민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 예수의 변모, 알렉산드르 이바노프.(18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始祖)가 된 분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로만은 설명이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르 9,9)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태어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깨닫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자인 왕 파라오와 함께 계시지 않고, 천대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도하여, 이집트에서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그 거사(擧事)의 성공은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 주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런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탈출 33,19)으로 체험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고, 죄책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자유롭게 또 보람 있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도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왕과 사제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치부하고, 대우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횡포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과거 예언자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은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을 말하면서, 그들도 남을 심판하는 높은 신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며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자각하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이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것들은 하느님을 알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짐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을 깊이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일, 곧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려 하지 않고, 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자유 안에 하느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운동입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 쓰라는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이 지닌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는 이기적인 아집(我執)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아집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득권자들의 오만방자한 횡포가 사회에도,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 읽어 낸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기적 아집을 벗어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은 또한 3.1절이기도 합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그날 희생되신 분들도 우리는 오늘 기억해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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