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29]

세월이 그냥 흐르는 건 아닌가 보다. 청국장을 띄울 때마다 실패를 거듭해서 자신이 없었는데 이젠 감을 잡았다. 얼마 전부터는 띄웠다 하면 하얀 실이 줄줄실실 잘도 나온다. 지난겨울엔 고군분투 하긴 했으나 친정 엄마 도움 없이 김장을 해 냈는가 하면(김장 독립!), 우리 신랑이 이게 떡이냐 빵이냐 되물었던 홈메이드 빵도 이젠 제법 잘 부풀어 빵 꼴을 갖추어 간다. 나처럼 어설픈 이도 뭔가 해내는 날이 오다니.... 그러고 보면 어찌 되든지 간에 끈질기게 해 보는 것만큼 빠른 길은 없는 것 같다.

그런 뜻에서 올해 설엔 쑥떡에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전라남도에서는 설이 되면 쑥떡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게 참 의미심장하다. 아직은 황량하고 싸늘한 겨울 풍경에 둘러싸인 가운데 푸르른 떡을 마주하는 느낌은, 뭐랄까.... 가슴 벅찰 정도로 반갑다고나 할까?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비밀스레 달려오고 있는 푸른 봄을 눈과 혀로 확인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새롭다. 게다가 짙푸른 쑥떡을 누런 콩가루에 묻혀 먹는 그 맛은 또 얼마나 특별한지....

나는 번번이 외할머니에게 쑥떡을 얻어먹곤 했기에 마을 할머니들이 쑥떡 준비로 부산할 때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쑥떡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걸 보니,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힘들더라도 내 손으로 만들어 넉넉하게 먹이자는 요량으로 지난봄부터 쑥떡을 모시기 위한 대작전에 들어갔다.(여기서 대작전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것은 쑥을 준비하는 일부터가 그리 만만치는 않아서 작정하고 달려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 방앗간에서 빼온 떡을 한 덩이씩 빚는다. 내 손으로 빚는 맛이 떡 맛을 더한다.ⓒ정청라

쑥떡을 먹으려면 봄부터 준비한다

그러니까 지난해 봄 내내, 집을 나설 때마다 쑥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언제 어디서건 쓸 만한 쑥이 보였다 하면 그 즉시 낫으로 베어 가방에 넣는 민첩함을 발휘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애 둘을 달고 다녀야만 하는 형편이니 하나는 들쳐 업고 하나는 끌고 다니면서 낫을 휘둘러야 했다.

그런데다가 낫으로 쑥을 베어 오면 그걸 또 일일이 다듬어야 한다. 굵은 대와 마른 잎 따위를 뜯어내는 것이다. 또 시들기 전에 끓는 물에 데쳐서 바싹 말렸다가 비닐봉지에 넣어 야물게 묶어 두기까지! (그냥 말려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리는 동안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쑥이 다 날아가 버리니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양이 눈에 띄게 확 줄어드니 허무하기도 하지만, 삶의 보물을 압축시켜 저장해 놓은 것 같은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니 그 쑥이 오죽 귀할까. 부엌 수납장 한 편에 소중히 간직한 채 쑥떡 하러 갈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설을 앞두고 한평 할머니로부터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쑥 삶았어? 언능 삶어. 나도 방금 솥에다 올려 놨응께."
"방앗간에 쑥떡 맡기려고요? 쌀은 언제 담가요?"
"쌀은 난중에 담그믄 되아. 쑥부텀 푹 삶아. 잉?"
"네!"


대답은 잘도 해 놓고 잊어버린 채 다음날 오전이 되었다. 밥을 짓는다고 쌀을 씻고 있었는데 한평 할머니가 또 찾아오셨다.

"쑥 삶았어?"
"아뇨. 아직.... 밥부터 안치고 삶으려고요."
"빨리 삶어. 난 어즈께 다 삶아서 찬물에 담가 놨단 말이여."
"삶고 나서 찬물에 담가 놔야 해요?"
"담갔다가 깨까시 씻어야 되아. 씻을 때 돌도 일고.... 안 이믄 찌걱거려서 떡 못 묵은께 꼭 일어. 잉? 그래가꼬 물끼 꼭 짜서 저녁에 찢아."
"엥? 찢기까지 해요? 그냥 가져가면 안 되나?"
"찢아야 쑥이 몽글몽글하니 좋당께. 긍께 꼭 짜서 찢아. 잉?"

한평 할머니는 몇 번씩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들통에 쑥을 넣은 채 불을 지피는 것을 보고 물 높이를 점검하신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쑥떡을 처음 해 본다니 여러 모로 걱정스러우셨던가 보다. 하긴, 그냥 쑥만 삶으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복잡한 과정이 첩첩산중처럼 기다리고 있으니 고수 입장에서 하룻강아지인 내가 못 미더우실 만도 하다. 쑥떡 하나 입에 넣기가 뭐 이렇게 어려운지. 먹고사는 일이 정말 만만치는 않다.

아무튼 꽤 많은 양의 쑥을 씻고, 조리로 일어 건지고, 물기 짜서 찢고, 다시 물에 담그고.... 며칠 동안 심심할 새가 없었다. 중간중간에 한평 할머니의 점검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방앗간에 가기 하루 전날엔 쌀도 네 되나 물에 담가 불렸다.

드디어, 쑥떡 맡기러 방앗간에 가는 날,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수봉 할머니로부터 신호가 왔다.

"다울이 엄마, 언능 나와!"

월산마을 방앗간

우리 마을에서 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월산마을 방앗간에서 우리 마을 사람들을 실으러 온 것이다.(월산마을 방앗간은 명절에만 문을 여는 도깨비 방앗간으로 인근 마을을 돌며 떡할 사람들을 손수 실어 나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차가 없는 사람들에겐 떡 맡기는 것도 큰일인데, 이런 식으로 실으러 오고 실어다 주고 하는 게 참 고마웠다. 더블캡도 아니고 2인승 트럭의 앞 칸에 나와 수봉 할머니, 한평 할머니, 그리고 다울이까지 넷이서 꽉 끼어 가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방앗간에 다다르니 하얀 연기가 자욱했다. 나무로 불을 때서 기계를 돌리는 특이한 구조라, 아궁이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거였다. 처음엔 연기 때문에 눈을 못 뜨고 있다가 연기에 익숙해지며 찬찬히 살펴보니 어느샌가 수봉 할머니는 떡가루를 빻고 계셨다. 그러더니만 또 어느샌가 쌀가루에 소금 간을 하며 떡 찔 준비를 하고 계셨다. 경험이 많으셔서 혼자서 척척, 주인보다 앞서 일을 해치우셨다. 그뿐인가. 쌀가루와 쑥을 켜켜이 앉혀서 찌는 공정이 끝난 뒤에는 떡을 빼는 기계 앞에 있다가 떡이 나오는 즉시 다독거려서 들통에 담기까지.... 그야말로 주인 할머니가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전 과정을 셀프로 진행하셨다.

한편, 한평 할머니는 눈치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구박을 받기 일쑤였다.

"가만 섰지 말고 떡가리 받어."
"쑥이 요맨치밲이여? 쑥이 모지라믄 쌀이나 적게 불리제만은."
"달게 할거믄 설탕을 갖고 와야제. 쑥떡 한두 번 해본당가?"
특히 쌀가루를 앉혀서 찌고 보니 한평 할머니 떡이 붉은 빛깔로 나와서 방앗간 전체가 들썩거리기도 했다.
"뭐시여? 쌀이 삘간 쌀이래? 내 생전 삘간 떡은 첨 보네."
"긍께 말이여. 이게 뭔 일이래?"
"쌀을 너무 일찍 담가서 쌀이 쉬었는갑서. 긍께 쌀이 삘개지제."
"한평떡은 하는 일마다 왜 근당가...깔깔깔."

나에게는 하늘처럼 우러러보이는 스승님인데 밖에 나오니 여기저기서 구박을 받으시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웃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인 것 같아 덩달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비록 한평 할머니는 속이 상해서 뚱한 표정을 지으시긴 했지만, 떡 맛은 쉰 맛이 아니라는 말에 금세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되셨다.

나는 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아무튼 간에 나는 수봉 할머니와 한평 할머니의 중간쯤 되는 자세로 떡 빼기를 무사히 마쳤다. 방앗간 주인 할머니가 떡 맛을 보시더니 현미라서 더 고소하다고, 새댁이 떡이 젤로 맛있다고 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쑥떡을 같이 하러 간 수봉 할머니, 한평 할머니와는 묘한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드디어 나도 쑥떡파 대열에 합류한 건가?

쑥떡이 든 대야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끼 제비 같은 입을 벌리고 다랑이가 달려든다. 그 입에 쑥떡을 떼어서 넣어 주며, 나는 내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떡을 하지 않은 마을 할머니들에게 쑥떡을 돌리며, 나는 내가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런 맛에 할머니들이 해마다 쑥떡을 하는 거겠지? 한 번 해보면 한없이 하고 잪다는 한평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내년에도 또 다시!'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정청라
귀농 10년차, 결혼 8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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