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이야기이지만, 천국과 지옥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사람들이 흉악해지다보니 지옥이 만원이 되었다고 한다. 지옥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급기야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담이 무너지고 말았다. 천국측에서는 당연히 보수를 요구하였으나 지옥측은 태연히 버팅기고 있었다. 천국측은 도리없이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측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뱃심으로 그렇게 버티는지 천국측이 다그쳐 묻자 지옥측은 세상의 유능한 변호사가 다 자기네 소속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응수했단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특정한 법조인을 폄훼할 할 의도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법적 논리가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 우스갯소리는 법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다.

법적 판결, 강자에 대한 배려

용산참사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피해 철거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심오한 법철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법적 논리가 지니는 결함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해 법적 논리는 그 나름의 일관된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덧붙여짐으로써 완결된다. 그 논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편에 유리한 조건에 따라 구성되며, 어떤 사건에 관련된 내용들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명문화된 법조문에 의거해 그 시비가 비교적 분명히 가려질 수 있는 단서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명문화된 법조문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부차화되거나 아예 사상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법적 소송은 진정한 의미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완벽한 논리의 재구성 성패 여하에 그 판결이 좌우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법적 판결이 이루어질 때 사회적 강자에게는 충분히 배려되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게는 배려되지 않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사회적 유력인사나 재벌 등이 범죄나 비리를 범했을 때 직접적으로 범죄 사건을 구성하는 요인 말고도 사회적 기여도 등이 폭넓게 감안되어 당사자가 형을 선고 받고도 그 집행을 유예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범했을 경우 그 동기나 정황 등이 충분히 헤아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좀도둑질만으로 완전히 인생의 행로가 뒤바뀌는 사람들도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사실은 법의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을 말한다.

법적인 논리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에 덧붙여 그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법이 정의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요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도 아니라면 그 법은 제도적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법질서 준수, 누구를 위해?

요즘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일에 관한 논란이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대통령은 수시로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고, 대법관은 ‘촛불재판’에 지침을 내려 개별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보장하기보다는 권력의 안위만을 보장하려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는 사태들이다.

국회에서는 ‘입법전쟁’이라는 이상한 말이 통용되고 있다. 어쩌다 법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 재벌의 언론사 소유를 가능케 하는 언론관계 법안들은 이미 통과되어 버렸고, 이 밖에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 및 사생활 보호와 직결되어 있는 집회와 통신 관련법안, 재벌에게 더욱 큰 힘을 실어주는 금산분리 법안 출자총액 제한 완화 법안, 민생과 직결된 교육세와 농어촌특별세폐지 법안, 수돗물 민영화 법안 등등이 쟁점이 되고 있다. 힘있는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서민들을 더욱 옥죌 소지를 안고 있는 법안들이다.

법의 집행도, 법을 만드는 일도 온통 힘있는 사람들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 주는 사태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질서의 준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말인가?

바울, 법보다 하느님의 영을 따라야..

율법의 속박과 동시에 그와 대비되는 믿음의 자유를 역설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토 3,). 여기서 문자는 율법 조문, 곧 법률 조문을 뜻한다. 이 말씀의 의미를 오늘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용산참사는 제도적 폭력 내지는 제도적 테러의 결과다. 법 조문에 의거한 폭력이요 테러다.

사도 바울은 때로 법의 운용과 집행의 문제를 지적한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율법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용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율법의 폐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법의 형식 그 자체, 법의 한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고 있다. 법 질서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구원의 희망으로 말하고 있다. 그 삶이 우리의 구체적 삶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수많은 법의 제약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추구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모양을 띠는지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과제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결단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서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문자로서 법 조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제약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법 질서를 준수해야 할 까닭이 없다. 그 법 질서의 준수는 끊임없이 ‘용산참사’를 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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