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2월 22일(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참조 : 루카 4,1-13)

지난해 서울 어느 대학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핵심질문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5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를 보면, “돈”이 첫 번째로 나왔고, 다음이 “행복”, “성공”, “가족”, “사랑”, “건강” 순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봐도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옵니다. 또한 “인생 성공의 증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한국과 중국 사람들은 10명중의 7명이, 일본은 6명,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캐나다 사람들은 10명 중의 3명 정도가 돈이 성공의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이나 재물 등, 물질적인 토대가 중요하고 또한 필요하지만, 돈이 삶의 첫째 가치이고, 돈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첫째 가치가 될 때, 과연 그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괜히 물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어디론가 분명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저변에 있는 개발과 성장 위주로 인한 물질주의적 가치가 터질 듯이 팽배해 있고, 그로 인해 교육 문화 또한 1등 다툼과 경쟁적 구조. 그래서 미래가 불안하고, 청년 실업자와 정신 질환, 자살자의 수는 증가합니다. 돈이 그렇게 좋고, 물질추구의 가치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 돈에 그 물질에 죽어 가는 것일까? 왜 다들 힘들어 하고 행복하지 못한 걸까?

▲ 그리스도의 유혹, 바실리 수리코프(187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한 후,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탄이 던진 세 가지 유혹은(루카 4,1-13 참조), 1)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 2) 당신이 나를 경배하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 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보라. 이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삶의 방향”에 대한 선택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빵, 돈)에 삶의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것을 거부했고,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명예를 거부했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을 시험하는 무례함을 거부했습니다.

사탄이 던진 유혹은 모두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만약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평생 동안 사탄의 노예로 살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란 조건은 당신 공생활 끝자리에서 또 다시 이런 유혹을 받았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태 27,40) 하지만 사탄의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과 선택은 오직 하느님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탄의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의 맨 밑바닥에 무엇이 있었을까? 악마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에 마음이 갔습니다. 광야에 들어오기 바로 전,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님이 들었던 하느님의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버지의 이 목소리는 광야에서 보낸 40일 내내 예수님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둡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단언할 수 있었고, "감히,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사탄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태 3,17)이라는,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유혹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옵니다. 나라는 존재감이 약할 때, 내 존재를 돈에, 물질에, 지극히 세속적인 명예와 자리에 나를 내어 줍니다. 유혹은 내 존재를 허물어트리는 거짓된 소리입니다.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을 수 없고, 유혹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나라는 존재를 그렇게 싸구려 가치에 팔 수는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은 내 안의 약함을 보고, 그 약함의 자리에 하느님의 힘을 느끼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또한 사순은 내 안의 광야를 보는 시기입니다. 극도의 가난한 상태에서 나는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가? 복음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가? 과연 나는 무엇으로 내 존재를 내세우는가?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가?
 

 
 

최성영 신부 (요셉)
예수회 성소 담당, 청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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