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메리놀 외방선교회 하유설 신부

 

▲ 메리놀 외방선교회 하유설 신부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가난은 돈이 없어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요?

돈이 없는 가난뿐만 아니라, 가난함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요.

89년까지의 한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미국에 가서 신학생들을 지도했어요. 그 기간 중에 1년 동안 버클리 예수회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여성신학을 접하게 되었죠. 생태신학도 조금 공부했고요.

그때부터 여성신학뿐 아니라 남성신학도 공부하면서 다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어요. 여성의 눈으로 신학을 보는 것이 여성신학인데요, 그때부터 가난함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형태의 가난-교회에서, 사회에서 소외되는 이들

돈이 없는 가난함도 있지만 여성들의 가난함은 권력도 없고, 사회 안에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에요. 여성의 눈으로 보는 사회, 교회, 성경, 신학은 굉장히 달랐어요. 그래서 이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성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면서 젠더 이슈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1989년부터 95년까지 미국에서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여성신학, 남성이 변화할 부분, 가부장제도,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이야기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그것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공감해줬어요. 사실 가난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에요. 가난함과 여성들이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된 거죠.

그러던 중, ‘권위주의에서 파트너십으로 향한 여정’을 알게 되었어요. 그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파트너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권위주의의 반대인 파트너십에는 남녀평등도 포함돼요.

성남 공동체에서 9년 동안 살면서 어느 정도 파트너십다운 경험이 있었기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교육을 많이 하고 있어요. 물론 교육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성들이 소외된 부분, 교회 안에서 소외된 부분도 가난의 한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광명 만남의 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도 만들었어요. 80년대 메리놀회 노은혜 수녀님이 만든 노동사목 집이었는데, 노동자들이 대부분 가난해서 아이들이 어려우니까,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도 함께 하는 집이었죠. 그 수녀님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제가 대표를 맡게 되었어요.

‘천주교 구라회’라는 한센병 이동진료팀도 맡고 있는데, 한센병을 앓았던 이들은 다른 형태의 가난함을 가지고 있어요. 소외죠. 지금은 완치되었지만 손발 등에 병을 앓았던 흔적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병력자들을 피하죠. 이들의 소외감은 돈이 없는 가난함과는 좀 다른 가난이에요. 경기북부지역 병력자 300명 정도가 사는 정착촌 8개가 있는데 그 마을에서 이동진료를 맡고 있어요.

지구 자체가 신음하는 가난도 있어

1989년에 1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생태신학도 접했어요. 그것도 제게는 새로운 관찰이었죠. (생태신학의 관점에 따르면) 진화과정 자체가 발전단계라고 볼 수 있어요. 우주를 포함하는 세상의 발전단계가 있고, 인간도 발전단계가 있죠. 이 발전정신으로 이제는 우주를 바라보게 되고 신앙도 바라보게 되었어요. 물론 진화도 하느님이 주관하시죠.

지구의 어려움, 예를 들면 수질오염, 공기오염, 새만금 파괴 등으로 지구가 신음하고 있잖아요.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고. 생태신학 덕분에 이런 것들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이제는 그 관점으로 보고 있어요. 지구 자체의 가난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지구의 존재가 위협받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위협받는 것이기에 지구 전체에 대한 생각이 중요합니다. 인간만의 편의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새로운 생태신학의 관점으로, 생태 영성으로 지금여기를 바라봐야 해요.

이런 시각은 가난과 연결됩니다. 이제는 단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좀 더 가난하게 살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간이 위기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수도자들이 청빈서원을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징표라고 봐요. 지구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서원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절멸할 수밖에 없어요.

지구 안의 모든 인간이 미국이나 한국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지구는 그 정도 자원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꿔야 해요. 여태까지 발전! 발전! 발전! 했던 것은 물질적인 발전에만 집중되었고, 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면서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어요. 지구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검소한 삶으로만 가능해요.

▲ 촛불평화미사에서 여성공동체가 진행하는 전례에 함께하는 하 신부

노동 사목은 노동자들의 가난을 해소하자는 것인데, “가난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면 대립되지 않나요?

가난함은 두 가지 형태죠. 하나는 ‘선택한 가난함’입니다. 선택한 가난함은 비굴한 가난함이 아니에요. 단순한 삶은 좋은 것이에요. 이건 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의 다른 형태는 ‘강요된 가난함’입니다. 생존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가난함이죠. 누구에게나 생존이 유지될 수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는데,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가난함은 나쁜 것입니다. 악이에요. 이런 가난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다른 욕구들, 이를테면 소속감, 유대감 같은 욕구들도 보장되어야 해요. 한센병 병력자들의 소외감 또한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옳지 않은 가난함입니다. 공부하고 싶은 욕구, 성취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그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검소한 삶이 무엇인지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민주노총, 전교조 등이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옳은 일”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악조건 속에서 노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운동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운동들은 우리의 권리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의 권리도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운동의 비전은 보다 넓게 나아가야 하는 거죠.

인간 발전은 자기에 대한 도취를 줄이고 보다 넓은 연민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막 태어난 아기는 자기밖에 모르지만, 차츰차츰 엄마아빠를 알게 되고 가족을 알게 되면서 가족중심으로 살 수 있어요. 아이들은 얼마 동안 우리 가족이 최고라고 여기고 살죠.

하지만 더 의식을 갖게 되면 이제는 가족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합니다. 학교, 주위 이웃에 대해서도 생각하죠. 그 다음에 자신의 나라가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것도 끝은 아니에요.

내 회사, 내 노동조합, 내 그룹에 대한 소속감도 생기는데, 이것에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더 넓혀야 합니다. ‘세계중심주의’같이 보다 넓은 인식을 갖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보다 넓은 삶에 관심 갖는 것인데 여기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죠.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이 노동자들을 넘어서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건 옳은 일이에요.

우리의 좁은 세계에서 해방되어 보다 넓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다 넓게 다른 나라들에게, 보다 넓게 지구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의미의 가난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캔 윌버라는 철학자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음 계속)

 

백승덕/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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