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구체적인 그(그녀)와 우정을 나눕니다. 제 눈앞에 있는 그(그녀)가 제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인 그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삶이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방법은 이것입니다. 제 앞에 있는 구체적인 그(그녀)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내가 그가 됩니다.

저는 존재라는 단어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존재라는 단어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역할이 아니라 존재함으로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희망,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이 희망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희망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망각이 주된 삶의 기제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집단화된 그림자가 하나의 위력으로 실재하는 현실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위선입니다. 4대강 죽이기, 자원외교, 세월호참사, 군부대 성추행과 폭행, 왕따, 서열 세우기, 양극화, 교수들의 성추행, 비정규직의 확산, 군주처럼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르는 교회, 역사 왜곡, 공권력의 해바라기, 특히 이제 놀랍지도 않게 된 공직자들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수치심을 잊어버린 얼굴들....

집단화된 그림자의 위력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죽은 언어로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은 코미디 극장에서 연기를 펼치는 늙은 배우의 대사가 되어 갑니다.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고 가슴은 답답합니다. 전에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모습을 감췄던 그림자가 이제는 성공을 위한 중요한 기제가 되었습니다.

성공하려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 옆을 아무런 느낌 없이 지나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루저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햄버거와 피자를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갑니다.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회에서 교회에서 전하는 사랑과 희생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느 주교님 말씀처럼 겸손함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겸손하지 못해서 사회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일까.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움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잠시 뒤로 물러섭니다. 답답함에 밖으로 나가서 외치기보다는 고요 속에 머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멈춥니다. 이 사회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집단적인 것이라면 그 그림자는 제 안에도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듣습니다. 그림자가 알려 주는 길을 듣기 위해서 침묵합니다.

▲ 충남 청양군 지천구곡.(사진 출처 = 청양군 홈페이지)

청양의 하늘은 깨끗합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깨웁니다. 특히 청양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모든 빛이 사라지고 나면 밤하늘에 주렁주렁 보석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늘을 보면서, 별이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어둠이 짙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둠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드러내 줍니다.

그림자의 위력이 강해지는 사회 속에서 그림자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제 안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고, 통합된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나병 환자의 고백입니다. 그의 희망은 강렬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선의 노력 중심에 내어 맡김이 필요합니다.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그 일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하고자 하시면....” 이라는 고백을 자주 합니다.

무엇인가를 희망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희망이 현실화되는 데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희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밝게 펼쳐질 미래를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웅이 영웅일 수 있는 이유는 영웅의 실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살아간다는 것이 희망 속에 내재된 그림자를 외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된 그림자의 위력으로 살아갑니다. 보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자신의 삶의 상태를 결정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의 힘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 자신의 꼴을 결정한다는 것, 역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의 공허와 초조로 쌓여 있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의 이치는 공평합니다. 내가 그림자를 외면할수록 희망은 잊혀져 가는 단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집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사회 안에 내재된 집단적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큰 아픔과 참사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몫은 미래세대가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의 침묵이 기성세대의 돈과 권력에 대한 추종을 만들어 냈고, 기성세대의 삶의 상태가 세월호참사로 상징되는 비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의 침묵이 결과할 또 다른 비극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두렵습니다.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사회, 그러나 희망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희망의 선취라는 오늘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금 내 앞에 현존하는 그(그녀)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제가 바라는 희망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지금까지 격주로 지금여기 강론대를 맡아 주신 임상교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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