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2월 15일(연중 제6주일 ) 마르 1,40-45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 한 사람을 낫게 한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믿으셨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분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이 알려 주셨다.”(요한 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 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며” 그를 고쳐 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법정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들을 격리시키는 시설들이 여럿 있었고, 현재도 있습니다. 격리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병을 진단하는 방식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 환자로 취급받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 환자는 마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 카파르나움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다, 제임스 티소.(1886)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병은 부정(不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죄인, 곧 더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레위 13,44-46 참조) 율법은 부정한 이들과 신체적 접촉을 금합니다. 접촉을 한 사람도 부정한 사람, 곧 죄인으로 취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면서 그 사람을 고친 다음,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부정을 벗어나는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나병을 죄의 대가로 주어진 병이라 믿었기에, 치유 여부를 사제가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와 접촉하였고, 임의로 격리를 해제하였기에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 곧 천형(天刑)이라 불렀습니다. 나병에 걸렸던 시인 한하운은 천형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병이 끔찍한 불행인 것은 하느님 혹은 하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면서 환자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시키고, 또 그 전염성으로 말미암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소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위 시인의 말을 빌리면, 환자를 하느님도 사람도 없는, ‘하늘 밖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겨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기고, 그에게 손을 대면서 먼저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그를 사제에게 보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등의 말씀을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당신이 부정한 인간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짓밟히고, 고통을 겪는 반면,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재물을 누리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 반드시 대우받는 세상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던 사람이 더 대우받기도 합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가사의한 일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면서도, 나병 환자를 고쳐서 사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 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는 일”, 곧 “선한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을 그분 안에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 주었으며...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53,4-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은 있어도 정의를 빙자한 분노는 없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분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죄에 속한 육의 모습으로”(로마 8,3)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 안에 같은 친교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당신과의 친교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정의를 빙자한 우리의 분노는 인류 공동체에서 우리를 분리하고, 우리 스스로를 높여서, 하느님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에 대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지, 보상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카 17,10)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