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7일간의 로마 여정에서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과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

지난 1월 28일 교황청 바오로 6세 강당에서 거행된 수요 일반 알현 만남에서 교황은 ‘부성 상실의 시대’에 대해 교리강론을 했다. 현대사회에서 아버지들이 가정 밖으로 쫓겨나 과도한 업무에 쫓기다보니 가정에서의 아버지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아버지가 없는 사회’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인 우리들을 돌보듯이 아버지들이 자녀들께 마땅히 할 바를 해야 인류사회의 기초인 가정이 바르게 설 수 있다는 요지였다. 그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순례자들의 교황을 향한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의 열기를 느낄 정도로 교황의 인기는 가히 슈퍼스타급이었다.

동시에 교황으로부터 ‘15가지 고질병 환자’로 질타 받았던 교황청 소속 추기경들, 단상 위에 동석한 그들이 신자들의 환호소리에 조금은 따분해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 채게 됨은 괜한 예민함일까. 어린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께 ‘호산나’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이 마뜩잖은 종교지도자들(루카 19,39)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교황의 대중적 인기 앞에 개혁풍을 거부할 순 없지만 그것을 따라가기엔 못내 내키지 않는 교황청 분위기.

ⓒ정중규

바로 전날 모두가 잠든 심야의 적막한 베드로 광장 주변을 거닐다가 건물 구석구석마다 추위에 떨며 거적을 두른 채 잠들어 있는 수많은 노숙자를 발견했던 바티칸의 또 다른 모습(귀국 뒤에 샤워장과 이발소가 마련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과 함께 이런 장면은 바티칸의 아픔으로 내게 와 닿았는데, 교회 쇄신을 위한 교황의 외로운 몸짓에 더욱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음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이번에 교황을 만나게 된 것은 서울대교구가 작은예수회 총원장 박성구 신부에게 내린 '휴직 곧 정직 제재의 교정벌'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교회법 전문 이탈리아 현지 변호사 코로나(L. Corona)씨가 확언한 대로 법적 절차상 하자가 있는 그 조치의 철회를 위한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조치의 원인이 꽃동네 비리 문제를 공론화시킨 ‘괘씸죄’였으니, 결국 꽃동네 문제 해결과도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날 직접 교황께 호소 편지를 전달하면서, 어쩌면 교회 쇄신에 있어선 동지일 수밖에 없는 그분과 마음으로 상통함을 느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교황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고서 그윽한 미소 머금은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266대 교황은 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했을까. 선출 뒤 첫 기자회견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리했노라 밝혔고, 현대판 황금송아지 우상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교회 안팎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가 걸어갈 새 길 곧 교회 쇄신의 지름길을 빈자의 성자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교회를 프란치스코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임을 확신한 까닭이리라.

베네딕토-프란치스코-이냐시오, 그 전통에서 피어난 꽃 프란치스코 교황

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로 성육신적 통전적(holistic) 영성 회복 차원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지난 이천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성속이원론의 정신분열증을 앓으며 혼미상태로 빠져들 때마다 예언적 죽비 소리를 내며 교회를 제자리로 돌려세웠던 것이 수도원운동이었다. 그것은 반쪽 자리 영성인 내세주의 혹은 현세주의를 모두 배격, 극복하는 통전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영성을 온전히 다시 드러내 보여주며 교회 쇄신에 이바지했다.

그 첫 번째가 베네딕도회 창립자 베네딕토였다. 기도와 노동을 균형있게 취한 것에서 보듯 세상을 등진 사막수도회가 대세였던 그 시대에 절제와 중용의 덕으로 정주수도회를 내세워 극단으로 치닫던 성속이원론의 정신분열증을 치유시켰다. 또한 중세 말기, 윗물(승려, 귀족계급)은 현세주의로 흐르고 아랫물(민중)은 내세주의로 내몰리며 교회가 부패하고 생기 잃은 세속화의 늪에 빠져들자 프란치스코회 창립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예수회 창립자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이 나타나 성육신적 통전적 영성을 재발견하고 복구시켰다. 프란치스코는 숭고한 하늘로 발돋움할지라도 지금여기의 겸손한 대지를 놓치지 않았고, 이냐시오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관상과 활동을 일치시키는 전일성 추구로 중심을 바로잡았다.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정중규

한 길로 통하는 베네딕토-프란치스코-이냐시오, 그 전통의 선상에서 피어난 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교회로 하여금 ‘저잣거리로 나가 불평등과 싸우며 상처받고 더러워져라’고 재촉하는 교황에게 하느님나라는 예수께 그러하셨듯이 하늘땅사람-세상을 하나로 관통하며 다가오는 그 무엇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태어나 살다 죽어 묻힌 곳, 아시시

움브리아 올리브밭 평원이 둘러싸고 있는 아시시에서 만난 프란치스코에게서 맡은 감미로운 냄새도 그런 것, 프란치스코에게 이 세상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두 변형돼 부활할 몸(1코린 15,51)이었다. 한센인들도 달콤하게 껴안고, 굽비오 늑대와 대화하고 새들에게 설교하고, 술탄과 무슬림의 벗이 되고, 해와 달, 비구름과 바람 심지어 병고와 죽음과도 형제자매 되었던 프란치스코에겐 그레초 성탄 구유도, 라베르나 산에서 받은 다섯 상처도, 가시 없는 장미도, 감추어진 신비를 드러내는 일상의 육화 사건이었다. 그는 세상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변형시켰다. 어미새처럼 가슴에 품어 부화시켰다. 그리하여 아시시에는 부활의 빛이 가득하다.

800년 전 세상의 모든 것을 온전히 사랑했던 한 사람이 태어나 살다 죽어 묻힌 곳, 골목길 돌면 까꿍하며 그가 나타날 것 같은 아시시, 아시시에선 누구나 프란치스코의 숨소리와 체온을 느낀다. 거기에서 나는 탈혼의 프란치스코가 흥겨워 무릎 높이로 살짝 튀어 오른 그만큼 하늘나라가 땅으로 내려와 커튼처럼 드리운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코 시대에서 정지된 것 같은 중세적 마을, 골목상점마다 펼쳐지는 ‘프란치스코 팔기’조차 프란치스코스런 동화 같은 마을, 오히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극히 소박한 마을.

수도원 아치 회랑을 뒤로하고 들어선 성당에서 조토의 ‘프란치스코의 생애’, 치마부에의 ‘성모자와 네 천사 곁의 프란치스코’, 시모네 마르티니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다미아노의 십자가 등 오래전부터 간직해왔던 ‘상본’들을 프레스코화로 직접 만나 울컥했다. 아쉬운 것은 1997년 아시시를 덮친 대지진으로 산산조각 난 벽화들이 아직 완벽하게 복원되지 않은 것. 다미아노 십자가 밑에서 ‘무너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는 그분의 부탁을 받고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의 성전에 지진이 덮친 것은 어쩌면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는 뜻을 교회가 여전히 오독하기에 그분이 다시 성전을 흔든 것일까.

한 얼굴로 오버랩 되는 교황과 성인, 두 프란치스코의 얼굴

반세기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바오로 6세 교황은 공의회를 마치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무덤 앞에 무릎 꿇고서 “이번 공의회의 정신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 당신”이라고 고백했었다. ‘쇄신’과 ‘개방성’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교회를 쇄신하고 삼라만상과 평화를 이룬 프란치스코 복음적 영성과 상통함을 밝힌 것이었다. 그처럼 프란치스코는 지난 800년간 교회 쇄신과 인류 평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1986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전 세계 15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 평화기도대회(The Day of Prayer for Peace)를 개최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 페루자 국도 ⓒ정중규

다시 교회가 프란치스코에 눈을 돌리고 있다. 800년 전에는 프란치스코가 교황을 찾아갔으나, 이젠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찾아왔다. “독설의 팡세”에 나오는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영향력을 회복하려면, 모순에 시달리고, 히스테리를 전염시키며, 이단적 분노에 사로잡힌 거친 교황, 이천년 동안의 신학에도 구속받지 않는 야만인이 필요할 것이다”는 에밀 시오랑의 예언이 실현된 것일까. 자연과의 친화성에 비추어보면 어쩌면 세례자 요한 이후 가장 거친 성인 프란치스코, 그를 따르는 교황, 이제 그런 교황이 출현하였다.

두 프란치스코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있는 존재가 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와 전면전을 시작한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영성은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교회 쇄신을 주도하고 있는 교황에게 프란치스코의 삶은 말 그대로 ‘복음의 기쁨’이 될 것인가. 바티칸에서 확인한 것은 그 모든 작업이 분명 힘은 들겠지만,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아시시에서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오는 페루자 국도의 하늘빛은 프란치스코 영혼만큼 유난히도 푸르렀다. 성인이 무척 좋아했던 종달새라도 높이 날 것 같은 그 하늘 위로 두 프란치스코의 얼굴이 한 얼굴로 자꾸만 겹쳐 보였던 것도 그 까닭이리라.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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