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2월 8일(연중 제5주일 ) 마르 1,29-39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 활동한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렀다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네로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 회상한 바를 이야기로 남겼습니다. 그것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기록되어, 오늘의 복음서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같은 것이었지만, 그들이 회상하고 이야기하고, 문자로 정착시켜 문서로 만드는 과정에 서로 차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네 개 복음서들이 서로 간에 차이를 지닌 이유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첫 구절(1,1)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르코 복음서의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게 된 경위와 그분의 가르침이 어떤 기쁜 소식인지를 알리는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먼저 마귀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마귀들이 먼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마귀들이 알려 준 정보에 그 기원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사람들을 고치고 살렸을 뿐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초능력을 지니고 원하는 대로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 상상하면,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다양한 기적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게 된 것은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당신이 몸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마귀라는 단어들이 일상에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이나 마귀라는 단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고,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행동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죗값을 치르기 위해 그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어느 아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대신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루카 11,11-12). 인간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재앙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겪는 불행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오 5,45)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선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율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죄인이라고 버려지고, 좌절된 사람들이 그 절망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데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2012년 인천교구 사제연수 중 민들레 국수집에서 노숙인에게 배식 봉사를 하는 정신철 보좌주교.ⓒ지금여기 자료사진

세상의 불행을 대하는 방식

이 세상에는 각종 불행이 있습니다. 병고, 가난, 인간의 횡포와 실패 그리고 사고 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각종 어려움을 겪으면서 삽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인간은 성숙하고 마음의 깊이도 가집니다. 돈이 많고, 권력을 가져서, 혹은 걱정이 없어서, 인간은 행복하고 성숙하지 않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과시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열등의식에 시달리는 미숙한 인간입니다.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부모는 재물과 권력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숙한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행복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아무도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에서 우리를 면제시켜 주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아쉬울 때, 동원하여 이용할 수 있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실천하여 당신 자녀로 살 때, 그 생명의 기원인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웃을 고치고, 살리며,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노력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과 교감하는 시간을 특별하게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배웁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그것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은 것은 그 시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행동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선한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모두 내 것이고, 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 가족들만 행복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한 그만큼 우리 주변의 불행한 생명들에게도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합니다. 그들도 행복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노력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삽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기쁜 소식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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