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덕목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나 처분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한다. 바로 정의가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정의가 가치라 함은 정의가 우리의 삶에, 우리 사회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의가 덕목이라 함은, 우리 내면이 정의라는 가치를 원하고 추구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세상의 정의와 내면의 정의로 구별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015년 1월, 용산 참사 6주기를 지냈다. 수많은 집회, 보도, 고발, 영화, 전시 등을 통해서 밝혀졌듯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도시재개발 정책은 인권과 정의를 완전히 무시해 왔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이윤 중심의 정책이었다. 그동안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연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산참사 유가족 분들과 피해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이루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싸워 왔다. 그 덕에, 그만큼 우리 사회에 정의가 회복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 정의, 조토 디본도네(1267? -1337)
세상의 정의가 절박한 그런 현실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우리 내면의 정의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정의를 이루려는 노력,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싸움은 우리 안에 정의를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불의 또한 세상의 정의는 물론 우리 내면의 정의에도 심각한 피해를 준다. 불의와 싸울 때, 우리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불의가 우리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교묘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 정의를 성취하면서도, 내적으로 정의가 훼손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온통 망가지는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과 씨앗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생각해보자.(마르 4,1-20)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면의 정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만일 우리의 내면이 씨앗이 자라지 못하는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로 덮인 땅이라 하면, 우리 안에서 정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특히, 여기서 가시덤불의 경우는 중요한 것을 암시해준다. 하느님의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다.(마르 4,19)

걱정과 재물은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첫 번째, 걱정 또는 두려움! 걱정이나 두려움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겁을 준다. 우리가 여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무섭다고 등을 돌리면 걱정이나 두려움의 힘은 엄청나게 커진다. 하느님의 말씀을 막아 버리고 싶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걱정은, 마귀의 운동장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승패는 결정된 셈이다. 우리는 걱정에 짓눌린 나머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여력이 없어진다. 찌그러든다. 마음이 말라 버린다. 종래는, 길바닥이나 돌밭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사실, 걱정이나 두려움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다. 우리의 반응에 따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힘이 셀 수도 있지만, 아무런 힘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처음에 단호히, 맞선다면, 걱정이나 두려움은 우리에게 전혀 힘을 못 쓰고 사그라진다. 걱정과 두려움은 겉으로는 굉장히 위협적인 것 같지만, 허상일 뿐이다.

두 번째, 재물! 재물은 걱정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재물은 걱정처럼, 드러내 놓고 방해물로 다가오지 않는다. 위협적으로도, 해롭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쓸 만한 것, 도움이 될 만한 것, 매력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복음도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 돈이 그렇지 않은가? 같은 맥락에서, 조직도 제도도 그렇다. 직위도 그렇고, 그에 따르는 힘도 그렇다. 세상의 불의에 맞서고,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모두 긴요한 것들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욕심’이 아니라 ‘필요’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경계하고 막기 쉽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작은 괜찮은데, 어느새 도를 넘어버리는 수가 많다. 왜?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세상의 정의 구현을 위해, 돈, 얼마나 있어야 하나? 힘, 얼마나 있어야 하나? 그러면서, 대개는 계속 늘려 간다. 그리고 거기엔 언제나 합리적인 이유가 따라 붙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망가져 간다. 한가한 말장난이 아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사회 여러 영역에서 헌신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망가지는 경우들, 자주 보지 않았는가? 지금도 여러 명망가들 중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에는 이런 실수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둑의 경우처럼, 복기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언제 어떤 식으로, 엉뚱한 곳으로 빠져 버렸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되고, 상황은 악화된다. 그러다 보면, 사람 자체가 변하게 된다. 돈과 힘의 매력에 푹 빠져 목적은 잊어버리고, 거기에 탐닉한다. 사로잡힌다. 오만하게, 군림한다. 돈과 힘이 있으니, 도움을 주지만, 시혜적이고 일방적인 도움이다. 철저히 나와 너, 우열을 구분한다. 대등한 대화는 사라지고, 지시하고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다.(마르 4,8) 문제는 세상의 겁박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이를, 식별이라 한다. 세상의 정의 구현을 위해, 나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 하지만 저들의 겁박에 찌그러들거나,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저들을 닮지 않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경계하자. 하여,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면서, 내면의 정의도 함께 자라나도록 하자.

평화는 정의의 결과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한 힘에 맞서, 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이루자. 이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우리 내면에도 정의가 우뚝 서도록 하자. 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가득하도록 하자. 우리를 통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퍼뜨리자. 우리 모두 그렇게, 정의와 평화의 사도가 되자!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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