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2월 1일 (연중 제4주일) 마르 1, 21-28

포장된 길을 걷다가 멈췄습니다. 푸른색이 보입니다. 갈색의 빛으로 채워진 산과 밭 사이, 조그만 둔덕에 푸른색이 보입니다. 둔덕에 낮게 엎드린 푸른색 생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움직임에 감탄합니다.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서 방에 화목 난로를 놓았습니다. 이른바 적정 기술로 만들어진 난로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갑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갑을 끼고 산에 오릅니다. 작년 여름에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찾습니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면 톱으로 자르고 잔가지를 모아서 내려옵니다. 이번에는 본당 신자들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자른 나무를 산 아래로 굴리거나 던집니다. 그리고 마당에서 도끼질을 합니다. 땀이 온몸에 흐릅니다. 그런데 기분은 좋습니다.

뿌리를 깊게 뻗고 굳건하게 서 있는 나무를 느껴 봅니다. 손으로 만지고 몸을 기대 봅니다. 거칠지만 차갑지 않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 자리에서 터 잡고 살아가는 생명, 지금 이곳에서는 제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주인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땅의 주인입니다. 다른 생명에게 열려 있는 주인입니다. 다른 생명에게 보금자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피신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주인입니다. 닫혀 있지 않은 생명,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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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꽃을 꺾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꽃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어서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꺾어 버리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존재하는 피조물의 보존과 지속을 위하여 부여된 창조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파르나움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가신 이유는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권위가 있는 가르침, 저는 아직 이런 가르침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가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권위는 폭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권위를 지닌 자가 되었던 상황을 견뎌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이 행사했던 권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권위는 사람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온전함의 회복을 위한 힘, 그래서 예수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위력(force)이 아니라 땅을 굳건히 딛고 설 수 있는 힘(power)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안에서 아름다움을 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낍니다.

마르코에게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신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은 그 일을 목격하고 놀랍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몰아내신 것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를 드러냅니다.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악령들은 저항합니다. 그런데 저항하는 방법이 좀 특이합니다. 악령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폭로합니다. 악령들은 반항적인 질문들 안에 예수라는 이름과 그분의 신원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을 거처에서 쫓아내려는 예수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고 시도합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고 있었던 자비와 사랑의 파동을 지닌 소리가 들리면 나의 온 존재가 깨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나의 존재가 변형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누군가 적의를 지닌 상태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 온몸이 굳어집니다. 긴장 그리고 싸움을 준비합니다. 몸과 마음의 조화가 깨집니다. 존재의 아름다움이 파괴됩니다.

어둠의 세력은 타인에 대한 앎을 위력의 자원으로 사용합니다. 조종과 억압 그리고 창조성의 파괴가 발생합니다. 불법 사찰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개인의 일상이 아무런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이나 기관의 컴퓨터 속에 저장됩니다. 개인정보가 동의 없이 다른 사람들 손으로 넘어갑니다. 타인에 대한 앎을 위력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악령들이 예수께 시도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아름다움의 파괴, 온전성의 파괴를 통해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들은 힘(power)을 바탕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힘이 아니라 파괴를 위한 위력(force)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습니다.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체제나 구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궁극적인 하느님 나라는 위력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답게’ 그리고 ‘그’가 ‘그답게’ 살아가는 것이 힘입니다. 자유와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힘입니다. 그래서 참된 힘은 지키고 보존하고 지속시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꽃만큼만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혓바닥에 창과 칼을 숨기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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