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언론] 3월 8일자 1009호 <평화신문>과 2638호 <가톨릭신문>

천주교회가 놓치지 않는 기본교리중의 핵심은 칠성사에 관한 것이다. 흔히 통신교리과정을 마친 예비신자들에게 이 교리만큼은 교리반에 출석해서 듣기를 권하곤 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칠성사란 이른바 세례, 견진, 성체, 병자, 고해, 혼인, 신품 성사를 일컫는다. 어느 교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주일학교 혹은 교리반을 통해서 또는 평생교리 시간을 통해서 교리를 습득하는 것은 교리 자체를 암기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교리 자체에 얽매이는 것은 그리스도라 일컫는 예수가 평생을 통해서 극도로 혐오했던 율법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각 성사가 지닌 본질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인간이 하는 수많은 일중에 특별히 이 일곱 가지의 행위(事) 앞에 거룩할 성(聖)자를 붙여 성사라 부르는 까닭이 무엇일까?

현대교회 특별히 한국천주교회의 오늘을 진단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적하는 어두운 구석이 교회가 상실한 ‘가난의 영성’이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못사는 것이 가난의 영성이 아니라 단순 소박한 것이 사라진 모습들, 애초에 예수와 예수 아버지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던 구체적인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 모습들, 기도와 실천이 사라진 일중독증(Workaholicism) 현상들이 표출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그 누구도 한국천주교회를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거나,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 한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려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교회 외부에서는 한국천주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 조중동 혹은 강남과 가까운 공동체로 의심을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이 의욕을 가지고 2008년에 시작한 기획이 ‘커버스토리’였다. <가톨릭신문>은 ‘시대의 징표’를 읽는 기획물의 첫 주제를 단도직입적이지만 “한국교회는 가난한가?”라고 뼈아프게 화두를 던졌다. 굳이 추상적이지도 않게 천주교인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잠재해 있는 물질에 대한 무감각은 결국 본질을 삼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교회의 핵심교리를 실천함에 있어서도 따라다니는 물질적 표현의 습성은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다음에야...”라는 자기비하로 까지 번진다.

한번 칠성사의 본질이 아닌 예식과 관련한 돈을 따져보자. 세례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든다! 견진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든다! 성체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아직은 안 든다! 고해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중세유럽에서 들었다! 병자성사에 돈이 드나? 드는 곳도 있다! 혼배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 있다! 신품성사를 받는데 돈이 드나? 새 신부는 모르지만 옆에서는 많이 든다! 천주교회의 정점이라 부르는 주교 아니라 추기경, 교황도 평신도에서 시작하여 신학생, 부제, 보좌신부에서부터 출발을 했다. 그리고 제법 긴 사목활동을 통하여 그가 귀가 있으면 듣고, 눈이 있으면 보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했을 것이라 믿는다.

<평화신문> 3월 8일자 4면에 박스기사로 처리한 “혼배 비용 걱정 더세요”란 기사는 현재 혼인성사를 함에 있어서 제법 많은 비용이 들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사 본문에 나오는 연희동 성당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을 배려하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혼인성사의 본질이 아닌 것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은 기사 본문에 나와 있는 성전 및 폐백실 사용료, 독서, 성가대 등 전례진행 사례금, 냉, 난방비 등외에도 본당마다 다양한 이름의 부대비용(제대꽃값, 입장 꽃길, 복사단 식대, 예식용 바닥깔개 세탁비, 화환쓰레기 처리비) 등이 따른다. 심지어는 혼배와 전혀 관계없는 건축기금을 패키지로 받는 성당도 있다. ‘워낭소리’에 출연한 소가 웃을 일이다. 천주교회에서 혼인미사를 해본 사람이면 모두가 유쾌하게 시작해서, 불쾌하게 준비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막을 내리며 곧 잊어버리는 폭탄 돌리기의 연속이다. 아직도 교회의 장상들은 무엇이 그들의 ‘양’들을 이런 어리석음에서 헤매게 하는지 모르시겠는가?

천주교회, 즉 성당에서 혼인하는 이미지를 대중매체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면 우리는 그 어리석음의 일단을 알게 된다. 거룩함이나 엄숙함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지만 혼인 전문(?) 성당들의 이미지는 화려하고 예쁘고 멋있는 거기에 약간의 고색창연한 엔틱 이미지가 가미된 것이 훨씬 솔직한 것이다. 신랑 신부가 혼인을 함에 있어서 하느님이 함께 해 달라고 축복을 청함보다 그런 변질된 이미지가 앞선다면 교회가 말하는 성사는 이미 갈 때까지 간 것이다. 그런 천박함에 합세해 교회가 이런저런 품목을 돈으로 환산하고, 뷔페와 사진 등은 지정업체를 정해주고, ‘알아서 준비해야 하는’ 미사예물에 이르러서는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세상의 대안이라고 불리는, 불리고 싶은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혼인은 특별히 성사라고 부르기에 더욱 단순 소박한 예식이 되어야 한다. 꽃길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함께 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성가대가 있어서 웅장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내 배필로 받아드리겠다”는 다짐이 있어 웅장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중의 하나인 칠성사에서 꽃값이니, 사진비니, 감사금이니, 사례비니, 축하금이니 하는 것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고민을 시작하자. 단순히 어려운 이웃들을 배려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함께 하는 자리를 배려하자는 것이다. 교회의 장상인 주교가 고민해야하고, 주교의 협조자들인 사제들이 고민해야 하고, 수도자들이 세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곧 수도원의 일 인양 체험해야 하고, 평신도들의 과감한 실천과 함께 밝은 눈과 귀를 지닌 교계신문이 용감히 말해야 한다.

어느 영화에서 예수의 성배를 화려함의 상징인 황금으로 판단한 사람은 죽었지만, 나무성배를 찾은 사람은 살았다. 예수는 단순하고 소박한 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왜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성당에서 결혼하느냐?”는 소리가 나올 즈음이면 한국천주교회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다가온 것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우리는 누구일까? 교회의 화려한 등을 꺼라.
 

김유철/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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