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메리놀 외방전교회 하유설 신부

 

헌팅캡을 쓴 노신사 하유설 신부. 시국미사와 같은 현장에서는 늘 하 신부를 만나게 된다. 1969년 처음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가난은 그가 포기했던 사제의 길을 다시 걷게 만들었다. 그 뒤부터 줄곧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한 하 신부에게 ‘가난’은 중요한 주제다.

성남에서 노동사목을 시작으로, 가난과 관련되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그에게는 그동안 여러 일들이 맡겨졌다. ‘성남 메리놀 공동체’를 만들고 ‘광명 만남의 집’, ‘천주교 구라회’를 맡으며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늘 바빴다. 노동자, 여성, 어린이, 한센병 병력자들과 함께하며 늘 쉼 없이 움직이면서도 그는 이런 삶이 “내게 잘 맞는다.”며 웃는다.

한겨울의 한기가 이제는 한풀 꺾였음에도 감원과 임금삭감 등의 한파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요즘, 하 신부를 만나 그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인지, 지금여기에서 ‘가난’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물었다. 하유설 신부 인터뷰를 3편에 걸쳐 싣는다.

▲ 메리놀 외방선교회 하유설 신부

베트남전 참전 대신 선택한 한국행

신부님은 1969년 평화봉사단으로 처음 한국에 오셨는데요, 베트남전이 한참일 때 참전 대신 평화봉사단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때는 미국 안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했어요. 감옥에 가거나, 캐나다로 도망가거나, 저처럼 평화봉사단을 선택하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그냥 참전하기도 했죠.

그 당시 저도 반전, 평화에 대해 고민하면서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미국에는 대체복무에 대한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고, 봉사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평화봉사단을 선택했어요. 평화봉사단으로 몇 년 정도를 봉사하면 나이 때문에 자연히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3년 동안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죠. 그런 것을 보면 당시에도 평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모든 젊은이들이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아요. 당시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도중에 중단했어요. 마침 그 시기에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죠. 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또 그 시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때이기도 했어요.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있었던 시기죠. 그런 변화의 바람이 부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 즈음 반전 데모에도 참여했어요. (데모에 참여하면서) 도로시 데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가톨릭일꾼 Catholic Worker>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던 도로시 데이는 젊은 평신도로서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을 했던 사람이에요. 제게는 큰 영향을 주었죠.

평화봉사단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국을 선택하셨나요?

대학 3학년 때 한 달 정도 유럽에 가서 공부했어요. 한 달 정도 운영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는데, 재미있는 좋은 경험이었죠. 다른 문화를 많이 경험할 수 있었어요. 특히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인터뷰도 했죠. 그러다보니 제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에 대해 공부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하게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나중에 평화봉사단으로 가려고 할 때, 대구에서 온 지인이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어요. 박사 과정을 중간에 그만뒀지만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던 경력 덕분에 영어 강사로 뽑히게 되었죠.

한국에서 접한 첫 번째 가난-구두닦이, 넝마주이, 고아

한국에서 평범하게 영어 강사로만 일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한국에 와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어요. 낮에는 영어를 가르쳤지만 저녁에는 대구 지역에 있는 고아원에서 봉사를 했어요. 그냥 개인으로 참가하는 봉사활동이어서 의무적인 건 아니었죠.

그러던 중에 어떤 구두닦이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 친구 덕분에 BBS라는 구두닦이 단체를 알게 되었어요. '개미마을'이라는 넝마주의들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들과도 어울리게 되었어요. 저에게는 새로운 세계였어요.

미국에서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구두닦이, 넝마주이들의 삶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 맛보게 되었어요. 3년 동안 대구에 있었고, 3년 동안은 서울에 있었는데 이때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삶에 대한 눈을 떴어요. 가난함을 배우고, 직접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죠.

그때까지도 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가난에 대한 경험을 하면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죠. 특히 대학에서 제가 철학을 공부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죠. 중고등학교 때 신부가 될 생각이 있었는데 신학교에 가지 못하고 그냥 철학을 결정했어요. 그래서인지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내가 왜 이걸 공부하고 있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던 중에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분들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면 교수를 해야 하는데, 박사 과정을 다 못 마쳐서 맞지 않는 그 삶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다행이죠(웃음). 봉사하는 것이 더 제게 맞았어요.

가난, 포기했던 사제의 길을 다시 걷게 만들어

우연하게 구두닦이 친구를 사귀게 되고, 넝마주이들의 공동체에도 우연하게 가게 되고...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던 것 같네요. 다른 변혁운동들도 많았을 텐데 사제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한국에 온지 5년이 되었던 1974년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이란 뭘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생 동안 평화봉사단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저녁마다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때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이 성령쇄신기도회에 데리고 가줬어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죠. 뭔가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서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정말 진지했어요. 따뜻한 느낌도 있고. 하여튼 참 좋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어떤 생각이 일어났어요. “신부가 될까..” 처음으로 이 생각이 들었을 때, ‘5,6년 전에 이미 포기한 길인데..’라며 이것도 그냥 지나가는 바람은 아닐까 의심도 했죠.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한 1년 정도를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메리놀 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서울의 메리놀 회 신부님들과 선교사들을 만나서 상담했죠. 대학생 때 들어갔으면 미국의 교구로 들어갔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한국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한국의 문화도 매우 좋아해서, ‘아, 나의 부르심은 선교의 부르심이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성령께서 신기하게 나를 이렇게 이끄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1975년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메리놀 회에 입회했어요. 입회 뒤 1년 동안 있으면서 선교의 부르심이 제게 맞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남 야학 공동체를 통해 구조 악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다

그럼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접하게 되신 것은 언제인가요?

1975년 입회하고 3년 정도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1978년도에 다시 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왔어요. 외방선교회라서 실습을 해야 했거든요. 그때 알고 지내던 메리놀 회 고대훈 요한 신부님이 성남에서 야간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깊숙이 노동자들의 삶을 맞본 셈이에요.

평화봉사단은 봉사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제는 운동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노동자들, 특히 10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죠. 그들의 아픔, 일을 열심히 하고도 마땅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혹사되고 있었어요. 게다가 당시 여공들은 돈을 모아서 가족에게 보내야 했는데, 오빠 학비를 보태는 10대 노동자들의 희생, 아픔과 만나게 된 건 새로운 것이었어요. 야간학교 선생님들은 운동가 학생들이었는데 그것도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고 신부님은 사회학 책도 많이 읽고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이었어요. 그분의 영향과 함께 가난한 노동자들의 가난함을 직접 체험하게 되니까, 이제는 가난을 새로운 정신으로 보게 되었어요. 어떤 구조 때문에, 구조 악(惡)에서 나오는 가난함에 대해 이해하게 된 거죠. 군사독재라는 구조, 경제라는 구조 안에서 가난함을 보게 되니 시야가 넓어졌어요. 성남에서 야학과 함께 보낸 1년은 제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주었어요.

실습기간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1년을 신학생으로 공부하면서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그때 했던 공부 중에는 해방신학도 포함되었죠. 어느 수도회에서나 해방신학을 가르치는데, 실습하기 전에는 해방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긴 했지만, 진짜 경험을 하고 돌아가니까 그제야 해방신학이 무엇인지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여러 공동체를 공부하고 경험을 하고 나서 비로소 신품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품성사를 받았던 날짜가 참 공교로웠어요. 1980년 5월 17일. 5.18 바로 전날이죠. 한국과는 계속 어떻게든 연관이 되나 봐요. 그해 8월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제는 사제였죠.

1년 동안 한국어 공부하면서 어떤 사목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지요. 본당에는 한국사제들이 많으니까, 어떤 신부님이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팀 활동을 하자고 제안해오셨어요. 사제만이 아니라 신부, 수녀, 평신도, 수사 두 명씩 8명이 공동체를 만들자는 이야기였죠. 그분이 바로 지금은 돌아가신 민요한 신부님이었어요.

제가 신학생 때 민요한 신부님은 학장이었어요.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운동에 대해 공부하러 남미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저는 성남에서 야학을 경험하고 미국에 갔다가 한국에 왔죠. 그러니 우리는 잘 맞았어요.

평등을 지향하며 평등하게-‘성남 메리놀 공동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다시 성남으로 갔어요. 성남은 당시 굉장히 가난한 동네였고 성남에서 사목하는 사람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죠. 저희는 공동체에 ‘성남 메리놀 공동체’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성남 메리놀 공동체’에는 세 가지 개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검소한 생활”, 둘째는 “공동체 생활”, 세 번째는 “팀 활동”이었죠.

두 번째 “공동체 생활”과 세 번째 “팀 활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공동체 생활”은 같이 사는 것이고, “팀 활동”은 일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곳은 수도자들이 같이 살지만 따로 일하고, 어떤 곳은 따로 살면서 같이 일하지만 우리는 같이 살면서 같이 일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모토대로 그곳에 가서 조금 작은 집 안에서, 가난한 대로, 문턱 높지 않게, 주위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도록 했어요. 그렇지만 검소한 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냉장고도 없이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도 냉장고를 두지 않고 살았어요. 1981년부터 89년까지 그렇게 살았죠.

공동체의 주된 활동은 노동 사목이었습니다. 도시빈민사목, 의료사업도 있었어요. 간호사 두 분이 있었던 덕분이죠. 그리고 영적사목도 있었어요. 피정지도하고 영적치료도 하고 미사도 했죠. 그렇지만 제가 주로 했던 것은 노동 사목이었어요. 다른 사목도 함께 했지만 노동사목에 특히 집중했어요.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바로 성남에 들어갔기 때문에,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상황이 매우 어려웠어요. ‘성남 만남의 집’과 ‘베네딕토회’ 수녀님들과 함께 일을 하며 외국인으로서 어려웠던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성남에서 신학생으로 1년 동안 노동자들의 삶을 맛보고 신부로서 10년 남짓을 공동체에서 일하면서 이제는 노동자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이웃 노동자들처럼 검소한 삶을 함께 하니까 진짜 해방신학이 무엇인지, 해방자이신 예수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었죠. 이제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보게 되니 악은 개인 악도 있지만 구조 악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것도 가난함과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연결되었어요. 제가 노동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변화된 거죠.

공동체 내에서도 평등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셨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이 있었나요?

그전에도 도로시 데이의 삶을 알고 있었고, 메리놀 외방선교회 본부가 있는 뉴욕에 가게 되면서 더욱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평신도로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공동체도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해방은 공동체 안에서의 평등으로도 이어졌어요. 식사준비에서부터 청소, 빨래 등의 소소한 실천들도 돌아가면서 평등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결정할 것이 있으면 다 같이 결정하고, 위아래 없이 평등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죠. 민 신부님은 제가 신학생 때 학장이었지만 그런 사실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권위적인 모습 없이 함께 생활하셨어요. 남녀 구분 없이, 평신도/수도자 구분 없이 평등하게 9년 동안 그런 생활을 했죠.  (다음 편에 계속)

백승덕/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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