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이동화]

많은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갈등이 없기를 바라고, 또 어떤 이들은 조금의 갈등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특히나 조금의 갈등이 우리나라의 경제에 나쁜 영향이라도 끼칠까봐 걱정이다. 하기야 기득권을 대변하는 신문과 방송에서 매일같이 그렇게 떠들어대니 모두가 그런가 생각한다. 그래서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의 절규도 그러하고, 밀양과 청도의 송전 철탑을 반대하는 어르신들의 요구도 쉽게 이기주의로 폄하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갈등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다. 사회 안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갈등이 없기를 바라거나, 또는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생각이거나 아니면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일정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회적 집단’의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사회 현상이나 사회 문제를 갈등과 이해관계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세상 모두에게 좋은 일이거나, 또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없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언제나 또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도 세상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문법이 된다.

▲ 제주도 강정마을의 농성 현장.ⓒ정현진 기자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일은 국가 안보를 위한 국가 정책인데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뒤집어 물어보자. 해군기지를 지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은 누구이고, 손해를 보는 집단은 누구일까? 현재 해군기지를 건설 중인 삼성물산과 대림산업의 입장에서도 이것이 국가안보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자기들 이해관계의 문제일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 강의를 들으신 분이 나에게 물었다. ‘이렇게 핵발전소가 위험한 줄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모르는 모양이죠?’ 지금 당장 핵발전소를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핵발전소의 위험을 모르기보다는 그것에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들의 이익이 달린 핵발전소를 포기하기 어려울 게다. 그러니 그 위험천만한 것들은 되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는가.

여러 사회적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민중(demos)의 권력(cratos)를 뜻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귀족과 부호들의 권력을 배제한 시민들의 결정으로 폴리스(polis, 도시국가)를 운영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 설계도를 그린 루소, 로크, 몽테스키외 같은 이들에게도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절대 군주의 권력을 어떻게 제한하고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미합중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 같은 이에게도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전체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파벌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문제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였다.

가톨릭교회 사회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공동선의 원리가 뜻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사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자들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거슬러 모든 구성원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백주년” 46항)이고, 이렇게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존재이유(“사목헌장” 74항)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정말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기업과 재벌, 소수 기득권을 가진 사회적 세력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은 대단히 크고 강한 반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은 없거나 지리멸렬한 상태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근본적 이유이고, 세계 10위권의 부자나라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다. 민주주의가 지나쳐서 힘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부족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동화 신부 (타라쿠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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