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3화 (열세 살 때, 1952)

 

가장 어리고 또 가장 귀여워하시던 손녀를 잃은 고조할머니의 상심은 굉장히 크셨겠어요?

그래서 그 아픈 기억을 등지고 새 출발을 다짐하신 것 같아. 할머니는 뼈저린 여러 아픔들을 겪었던 영주를 떠나시기로 하신 거야.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는 결단하셨어. 봉화로 이사가자는 것이었지. 또 송기나 풀을 뜯어먹고 살기에도 영주보다는 오해 살아왔던 봉화가 나을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나는 6학년이니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나를 영주 외갓집에 맡길 작정으로, 할머니는 사돈이신 외할머니를 찾아가 부탁하셨고, 외할아버지께서도 애비에미 없는(!) 외손자 하나를 흔쾌히 받아주셨어. 그리하여 할머니와 형과 여동생은 봉화로 떠나고, 나 홀로 영주에 남게 되었지. 나는 외할아버지의 침실이기도 하고 한의사이신 외할아버지의 진료실이기도 했던 사랑방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먹고 자고 했어. 외할아버지랑 겸상을 하고 동침을 한 거지. 외갓집에서는 나를 특별대우한 거야. 당시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점심식사를 걸렀으니까, 나는 아침과 저녁식사를 감히 외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고 살았지.

내가 외갓집에 올 때 할머니께서 당부하셨어. ‘외할아버지나 외갓집 식구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절대 안된다,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과 싸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집에 돌아가 공부해라, 식사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혹여 너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외갓집 식구들이 제 때에 진지를 못 드시고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된다, 알겠지?’ 이렇게 외갓집 생활은 시작되었어. 모든 게 다 좋았지만, 불편한 것도 있었지. 이를테면, 동무들과 그렇게 싸돌아다니던 짓도 못하게 되었고 환자손님이 있을 때는 진료실인 사랑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방 주위를 서성거리거나 토방에 걸터앉아 참고서 따위를 읽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진료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진료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했지.

또 왠지 외갓집 식구들에게 늘 미안한 기분이었어. 그리고 처음 얼마동안은, 외할아버지와 단 둘이 자는 게 무척 조심스러웠지. 외할아버지는 젊으셨을 때부터 주무실 때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주무셨거든. 그렇지만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환자손님이 없을 때 외할아버지와 나는, 조선역사 얘기를 많이 나눴지. 외할아버지는 조선왕조 역사를 훤히 꿰고 계셨고, 나도 그때는 조선 역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거든. 하기야 외할아버지나 나나 그때는 백성의 역사가 아니라 임금이나 지배층 역사만 알고 있었지만.

외할아버지와 외갓집 식구들이 나한테 무척 잘 해주셨지만, 주눅 든 아이였던 나는, 늘 조심스럽고 미안스러웠으며 죄스럽기까지 했나 봐. 나도 모르게 긴장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새벽 눈을 뜨자, 이불이 흠뻑 젖어 있었어. 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지. 너무 놀라고 부끄러웠어! 나는 외할아버지 몰래(!) 이불을 개어 평소처럼 약 설합장 위에 올려놓고, 외할아버지나 외갓집 식구들이 눈치챌까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살얼음판을 밟듯 겨우 학교에 갈 수 있었어. 학교에 가서도 안절부절 못했지. 지금쯤 들통이 났겠지, 하며 애를 태웠어. 집에 돌아와서도 쭈뼛쭈뼛, 죄인은 어쩔 수 없었지. 저녁밥상 자리에서 외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조용히 말씀하셨어. ‘아이들은 밤오줌도 싸면서 크는 거란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하지만, 흠뻑 젖은 이불을 약설합장 위에 두면, 방 안에 냄새가 나니까 우선 바깥에 널어야 한다, 알겠느냐?’ 나는 기가 팍 죽었지. 안채에 있는 이종사촌 여동생한테도 부끄럽고......

주눅 들고 기죽은 아이였던 나는,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우리집이 있던 봉화에 돌아왔고, 그 후 결국 영주 외할아버지한테는 다시 가지 못했어.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외갓집 식구들, 그리고 담임선생님이셨는데...... 그리하여 우리집 식구 넷은 다시 모이게 되었지.

할머니께서 영주에 다시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졸업은 하고 오라고......

물론 가라고 하셨지. 하지만, 중학교에 갈 희망도 전혀 안 보이고, 그리고 뭣보다도 외할아버지와 외갓집 식구들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서 고집을 피웠지. 두어 달 모자라고 또 졸업장도 받진 못했지만, 나중에 졸업장이 필요하면 받을 수 있다고 우겼어. 나를 아껴주시던 담임선생님 배경을 믿기도 했고. 결국 할머니도 형도 내 고집을 꺾지 못하셨지.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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