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다윗의 돌팔매] 그날 이후 5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의 글을 보면, 당시는 비록 여러 나라로 갈려 있지만 인구 이동은 생각보다 자유로웠습니다. 국경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논두렁과 산마루, 강으로 이뤄진 국경이었지요. 부족 단위 경제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해도, 빈부격차 확대에 따라 망한 유민이 형성됐고, 강대국이 되려는 나라들은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이들의 유입을 적극 반겼습니다.

임금은 백성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이라는 맹자의 얘기는 이때 나온 것으로서,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인구를 잃게 되고, 그러면 결국 지배자도 손해라는 경고입니다. 물론 중국의 중심부인 중원에서 조차도 곳곳에 황무지나 늪지가 널려 있어서, 인구만 있으면 곧바로 개간해 국부를 늘리고, 그 돈으로 병장기와 갑옷을 사서 병력을 늘리고 할 수 있었던 때문입니다. '임금은 백성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라는 맹자의 경고는, 바로 이처럼 백성이 잘난 임금과 못난 임금을 비록 소극적이나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비로소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스스로 투표를 통해 못난 임금을 갈아치우고 새 지배자를 선택하는 서구식 민주주의는 확실히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좁은 대륙에 인구가 꽉 들어차고, 이미 민족국가가 형성돼서 자기나라 정치가 싫다고 해서 이웃나라로 자유롭게 이민해갈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 있었던 고대 중국과 달리, 그 절을 떠날 수 없는 중은 어쩔 수 없이 못난 주지승을 갈아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남한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끔 하는 농담으로, “우리는 전쟁 나도 갈 데가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가 나쁘면 남한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다른 좋은 나라가 이민해 갈 자유가 없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든지 아니면 꾹 참고 종으로 살든지 둘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남한의 민주주의 투쟁이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은 각자의 주관적 이유가 어쨌든, 결국 남한 사회에 대한 소극적 거부를 한 것입니다.

이주는 없는 자의 무기

어떤 이들은 남아서 싸우는 것은 애국이요, 혼자 떠나는 것은 매국이라는 식으로 구분합니다만,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손자병법에 따르자면, 이민이야말로 최고의 반독재, 반부패 투쟁 방법입니다. 거꾸로 보자면, 떠날 수 있음에도 떠나면 안 된다는 애국론은 지배자에게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피지배자들이 스스로 손발을 묶고 싸우겠다는데, 지배자들이야 반갑지 않겠습니까? 벼룩이 상자 밖으로 방향을 바꿔 뛰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아무리 높이 뛰어봤자 벼룩 주인에게는 두렵지 않습니다. 결국 “너희가 뛰어봐야 벼룩”이 되는 것이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애국론에 크게 지배당할수록 지배자는 그만큼 마음을 놓고, 양보를 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난한 자가 스스로 애국론을 외친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자승자박입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인 자본가들은 이런 이민을 그리 반기지 않습니다. 이민이 자유롭다면, 노동자들은 더 좋은 월급을 주는 자본가를 찾아 이동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본가들은 서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려 경쟁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난 수년간 귀에 못 박히게 들어온 것은,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를 선택해 들어오게 하려면 다른 나라보다 기업세를 덜 받고 더 많은 지원금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 특구 같은 것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본가들은 국가들을 상대로 경쟁을 시켜 임금을 후려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가 경쟁 구도의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인데, 컴퓨터 자판만 누르면 번개 같은 속도로 이동하는 자본과 달리, 구체적인 몸뚱이를 움직여야 하는 인간인 노동자가 불리한 형국입니다. 그리고 국가들은 국경과 국적, 여권이라는 제도, 그리고 철조망과 총을 가지고 국경 이동을 제한하고 있어서 노동자의 이동은 더욱 제한받습니다. 이러한 법적, 군사적 제한만 없다면 솔직히 노동자의 이동이 자본의 이동에 비해 아주 불리하지만은 않습니다.

요즘 중국에 투자했다가 망해서 공장은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오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자본도 공장 시설 등의 형태로 있을 때는,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제법 어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곧 죽어도 발로 하루에 백리를 걷는 동물이라 약 3년이면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주권은 존재하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 세계가 인구 과잉이라 불릴 정도로 인구는 많고, 따라서 새로운 이민에게 공짜로 내줄 토지, 곧 일자리는 부족한 현실에 부딪힙니다. 이민자들 때문에 기존 노동자의 일자리가 없다느니, 새 이민자들이 이미 세워진 사회복지 제도의 혜택만 누린다느니 하는 불만이 기존 거주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반이민적 정서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 이상을 거주하면서 세금을 내는 기여를 해야만 국적을 준다든지 하는 제도를 만듭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만이 없을 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적을 경매에 붙여 더 많은 값을 부르는 이에게 파는 것입니다. 정치를 잘 하고 사회복지가 잘 돼 있으면 그만큼 비쌀 것이고, 정치가 나쁘고 사회복지가 전혀 없다면 아무도 사려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이 국적권을 일종의 주식처럼 시장을 만들어 사고팔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정치적으로 노력해서 내가 가진 남한 국적권이 비싸졌는데, 이제는 늙어서 필리핀에 가서 살고 싶다면,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고 팔고 떠날 수 있겠지요.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잘 일궈 놓은 농장을 비싼 값에 파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 현재의 제도는, 이 땅을 떠나는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직접 소유한 돈만 가지고 떠날 수 있을 뿐, 그 사람이 현재의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은 버리고 떠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그 나라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다”는 숨겨진 현실이 있습니다. “내 나라는 내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민을 가든 이사를 가든 집이 있다면 당연히 제 값을 받고 팔아 그 돈을 갖고 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국적을 재산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정치가 잘못되면 누가 바로 잡으려 애쓰겠습니까?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지금 “내 나라”는 실제로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조 우주'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권을 사고 파는 사회에서는 달라집니다. 자, 이제 좋은 정치를 하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면? 당연히 기름진 땅을 비싼 값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한 값을 치르면 되겠지요. 이것을 주권 주식회사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모든 국민은 한 나라의 주식 하나씩을 가진 주주이고, 그의 주권은 주식처럼 대우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그러니까 사람 머리 하나는 다 똑 같은 권리가 있다는 데모크라시(democracy)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자기 땅의 값을 올리려고 밭에 거름을 열심히 주듯이 자기 국적권의 값이 올라가게끔 자기 나라가 좋은 정치가 되도록 관심을 갖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권이 중심 되는 사회체제, 그러니까 주권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얼른 보아 이 제도는 가난한 이의 이민을 막는 제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해 당장 비싼 국적권을 살 수 없다면, 곧바로 아주 잘 사는 나라로 이주할 수 없다면, 마치 달걀을 팔아 닭을 사고 닭을 팔아 돼지를 사고 또 소를 사는 것처럼 일단은 조금만 더 잘사는 나라의 국적권을 산 뒤 조금씩 더 저축해서 (비싼 나라로 만든 다음) 또 다른 나라의 국적권을 사면 됩니다. 아니면 지금의 황무지 같은 나라를 열심히 좋은 나라로 만들어 나라 값을 올리면 됩니다. 선택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이중 국적 같은 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국적이 두 개면 두 군데 나라에 세금을 내고 두 군데 나라에서 연금을 받으면 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서 주권주의

이 주권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 안의 문제였지만, 주권주의가 실현되고 주권 주식 시장이 생긴다면 모든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 국적권자의 눈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눈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나라의 정치가 독재국이고 부패국이라면 지금까지는 나라 밖에 나가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는 것으로 끝났지만, 주권 시장에서는 구체적인 각 국민의 재산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계 인민 전체가 부러워하는 복지국가, 정의국가라면 지금까지처럼 국가 이미지라는 플러스 알파의 이익을 얻는 정도를 넘어 나의 노년과 자손의 행복을 확실히 보장할 자산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인민 주권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돈”이라는 재산만 늘리기에 매달리지 않고 내 나라의 자연환경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도덕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노력할 것입니다. 현재의 사회체제는 자기의 재산만 불리는 사람에게 최대의 보상을 해주고, 반면에 사회 전체를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물질 보상이 없는 체제입니다. 이런 사회가 이기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거꾸로 말해 황금 숭배에 빠지는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회체제 안에서는 현명한 자입니다. 남을 돕는 것이 구체적 내 이익으로 돌아오는 사회가 아니고 오히려 내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계인의 눈으로 세계 주권 시장에서 주권이라는 주식이 매매될 때, 진정한 국경은 없어집니다. 지금의 국적별 투표권이라는 형태의 주권은 “내가 속한 합자회사의 주식”이 되는 것이고, 나는 세계 주권 시장에서 매매되는 각각의 주권이라는 주식에 대해 가격을 매김으로써 모든 나라의 정치에 주권자로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앞에서 말한 자본과 노동의 시장 주도권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본이 각국을 상대로 “내가 자본 투자를 하려는데, 누가 더 싼 값에 땅을 내놓을래?”하고 경매를 붙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만이 시장에서 평가받는 “유일한 재화”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자본이 부족해서 자본이 주도권을 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각 나라들은, 곧 각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들은 자본을 들여오기 위해 환경도 포기하고 문화도 포기하고, 노동자의 권익도 포기하고 심지어 부패도 용인합니다. 하지만 주권주의 사회에서는 그 나라의 환경도 구체적인 돈의 값어치가 있고 노동자의 권익도 값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판단해서 자본 도입에 얼마의 대가를 치를 것인지 결정하겠지요.

물론 이러한 과정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이러한 저가 입찰이 과연 합당한 수준인지 지나친 것인지 당장 알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은 유리한 위치를 활용해서 각 국가의 최대한 양보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 주식시장이 열리면, 각 나라의 정책은 세계인의 눈, 곧 세계 시장이라는 단일 시장에서 정책 제안 단계에서부터 주권의 가격이라는 형식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마치 어떤 회사가 새 사업 구상을 내 놓으면 주식 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으로 찬반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러므로 예를 들어 남한이 인천 자유경제구역을 위해 외자에 지나친 양보를 한다 치면, 세계인은 즉각 남한의 주권 값을 내림으로써 경고할 것이고 남한 정부는 이를 포기할 것입니다. 결국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상황에서는 자본의 우월적 지위가 적어도 지금처럼 일방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현재의 국민국가, 곧 민족 단위 국가라는 것은 자본이 세계화된 마당에는 오히려 주권자인 국민이 자본과 맞서 싸울 자유를 억제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국민국가 체제 아래에서 민주주의는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방법은 세계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간단하겠지만,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 정부가 수립돼도 그 보다 작은 자치체로서 각 국가는 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지역적 범위가 아닙니다. 핵심은 각 인민이 지닌 주권의 세계화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주권주의 사회라는 것이 꿈일까요? 탄소배출권 시장이라는 것도 가능한데 말이지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자본에게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고 선택권을 주는 사회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대의제 정치? 아니지요, 사람 머리 하나 마다 똑같은 권리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는 사회입니다. 인두세라는 말 들어봤을 것입니다. 민주 정치라고 추상화시키지 말고 인두 정치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대개 추상적인 말은 부패를 가리기 위해 쓰이지요.

현재의 단순한 대의제로서 민주주의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빈부격차를 낳고 금융 자본이 권력을 쥐는 결과는 낳는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이지요. 남한 사회가 이룬 민주화의 열매는 삼성이 다 따먹은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가 겪기 시작한 대고통의 시대는 근대 서구식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때문에 자본을 통제할 수 없어서 나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떤 정책을 펴든 결국은 다시 금융자본의 통제력만 더 강한 결과를 낳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해결'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자본에게 필요 없는 잉여 노동력이 돼 굶어죽을 사람 다 죽어 없어진 대고통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야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근본적 해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력을 쓰지 않는 바에야, 정치적 주권의 올바른 행사가 유일하고 올바르며 근본적 해결입니다. 그런데 현재 주권이 불완전한 것이고, 오히려 시시때때로 전 세계인에게 대고통을 안겨주는 자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진정한 주권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박준영/ 아시아가톨릭뉴스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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